오늘의 산행은 도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었다. 산 입구에 놓인 전광판에서 현재 기온이 표시되고 있었다.
34.4도, 불볕더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작 이 무더위 때문에 산바위에 발도 대보지 못하고 되돌아갈 순 없지 않은가.
그래도 습도까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49%, 이쯤이면 버틸 만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머릿속에서 계산된 과정이 현실에서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아무리 의지를 발휘하려고 해도 열 발자국 아니 다섯 발자국만 옮겨도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진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턱 밑까지 차오른 뜨겁고 거친 숨이 쉼 없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북한산 백운대에 오르는 등산코스 중에서 가장 짧은 거리인 도선사 코스가 오늘처럼 멀고 높게 느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2시 30분에 시작한 때문인지 산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간혹 하산하는 등산객들이 지나쳤는데 나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의아해하며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지곤 했다. 나였어도 그 시간에 올라오는 등산객들을 보며 걱정스러운 빛이 얼굴에 감돌았을 것이다.
도선사 코스는 산어귀에 도착할 때까지 데크로 만들어진 둘레길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이 길이 가장 가파르다. 어찌 보면 산길보다 이 둘레길이 더 진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평소와 같았으면 15분이면 족할 거리가 25분씩이나 걸렸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오늘 산행은 자칫하면 중간에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말이다. 본격적인 등판길이 시작되자마자 체력적인 한계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무더위가 이렇게 사람을 짓누를 수 있는지 모르진 않았다. 2년 전 7월 하순경 자신 있게 출발했던 북한산 14 성문 코스를 중도 포기하고 백운대를 찍고 내려오는 간단한 산행으로 서둘러 변경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다시는 이런 더위 속에서 산을 타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다. 산을 타면 안 되는 날씨도 있는 것이구나라는 걸 몸소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사실 오를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
내성적인 사람은 가장 시끄러운 내면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도 있듯이 오늘은 꼭 산속에서 에너지를 소진시켜야만 했다.
그래서였을까 하루재 고개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었지만 잠깐 거친 호흡을 고른 뒤에 다시 백운대를 향해 발걸음을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2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5월 초만 하더라도 70분 만에 오른 정상에 오르기 위해 두 배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믿기지 않는 무더위였다. 역시 머릿속의 계획은 그저 계획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날에 산에 오르는 것은 결국 미친 짓이었다는 것을 정상석 마당바위에 앉아 깊은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인정했다.
완주한 것만으로도 다했다. 오늘의 나를 소진하는 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