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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14 성문 코스

by 이각형





가장 좋아하는 등산코스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북한산 14 성문 코스, 광청종주 그리고 관악산 연주대 코스 이렇게 세 개를 말할 것 같다. 이 세 코스 중에서도 북한산 14 성문 코스를 가장 좋아한다.


그렇지만 지난 2년 동안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했었다. 2년 전 마지막으로 다녀온 뒤 백운동암문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2024년 4월부터 9월까지 이 코스는 막혀 있었다. 그렇게 1년 동안은 이곳에 올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물론 작년 10월부턴가 다시 개방되었기 때문에 가을께 찾아올 순 있었다. 아마 그때 왔었어야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2년 만에 이 길에 발길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내 체력이 약해졌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단거리 위주의 너무 쉬운 산행만 다녔을 뿐만 아니라 2년간 나의 몸을 단련시켰던 필라테스마저도 그만두었던 것이다.


시간도 사실 많지 않았다. 그래서 단거리 위주로 다녔었다.


그러다 이제 혼자 산길을 누빌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만큼 사무실에 앉아서 주말 날씨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주간 예보에 따르면 주말 동안 최저기온이 23도 가까이 떨어진다고 되어 있었다.


어제 최종적으로 확인해 본 결과 8~9시 사이에 등산을 시작하게 된다면 25도 이하의 기온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토, 일 알람을 주말 모드가 아니라 출근 모드로 변경하고, 일찍 잠들기 위해 맥주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래주었다.


그렇게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시작한 북한산 14 성문 코스는 서암문(시구문)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온몸이 땀으로 젖어버렸다. 기온은 23도쯤이었지만 습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18여분 만에 첫 관문인 시구문에 도착했다. 올라오는 동안 이미 에너지를 예상보다 많이 써버렸다.


집에서 챙겨 온 에너지젤을 먹고 다시 시작하려고 등에서 가방을 내렸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아무래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채 그대로 집을 나섰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키지 않긴 하지만 흔한 일이라 그다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래도 뭔가 도움을 받고자 했던 기회가 사라진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다시 걸어갈 길을 올라다 보니 우선 한발한발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하기 시작했다.


오늘 나는 어떻게 해서든 14 성문 코스를 완주해야만 했다. 그저께 친척동생을 불러낸 저녁 자리에서 동생 녀석이 내게 주말 계획을 물어봤을 때 14 성문 코스를 갈 거라고 힘주어 말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난 오늘 꼭 이 길을 걸어야 했다.


이 길은 혼자 걸을수록 훨씬 더 매력적인 길이다. 워낙 험한 길이다 보니 온갖 잡다한 생각들을 길바닥 위에 버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가파른 오르막길이 여전히 두려웠다. 9월 초에 예정된 하프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매일 런닝을 하고 있다.




이 런닝이라는 운동이 참 재미있는 것이 5분이나 10분 아니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계획하고 뛰면 정말 힘들다. 대신에 1분만 버티자라는 생각으로 시간이 흐를 때마다 1분만, 1분만이라고 다짐하다 보면 어느새 40분 가까이 뛰고 있게 된다.


그래서 오늘도 산길에서 1분만 버티자를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원효봉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만일 원효봉까지 1시간이 넘게 걸리면 오늘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스스로 도망갈 궁리를 하기도 했다.


2주 전에 이런 산행을 한 적이 있었다. 오후 1시쯤 시작한 산행이었고 출발 당시 기온이 35도였었다.


도선사에서 출발해 백운대까지 가는 길이었는데, 4월엔 55분이면 가능했지만 35도의 날씨 때문에 자그마치 2배인 2시간이나 필요했다. 정말이지 그날은 다섯 걸음만 옮겨도 도저히 여섯 번째 걸음을 내디딜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오늘도 원효봉까지 1시간이 넘게 걸리면 집에 가자고 생각했다. 보통 원효봉까지 45분이면 도착했었기 때문이었다.



원효봉에 도착하고 보니 50분 만에 올라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나마 오늘 날씨는 등산을 할 만하구나라며 스스로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너무 허기가 진 나머지 정상석 앞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단팥빵을 꺼내고 말았다.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새끼 고양이가 냄새를 맡고선 내 앞에서 얼쩡거리며 냥냥하며 울음소리를 내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먹던 빵 일부를 손가락을 잘랐더니 자기한테 줄 건 줄 알고서 내게 후다닥 다가왔다. 역시 고양이라 민첩했다.


고양이가 가까이 오는 게 겁나서 고양이 등 너머로 던져줬더니 빵조각이 떨어진 곳으로 후다닥 뛰어가서 날름 먹어치웠다. 그러더니 또 나를 쳐다보며 울었다.


한국인들은 한 번만 주면 정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마지막 한 입을 반으로 잘라 던져주고선 얼른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그리고 북문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원효봉에서 북문까지는 내리막길이라 5분도 안 걸린다.


북문쯤 가니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꽤 많이 모여 있어서 놀란 눈으로 봤다. 한 이십 명쯤 되었는데 모두가 다 헬멧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등산객이 아니라 등반객들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릴을 즐기고 나는 한계를 즐긴다. 즐거움의 종류가 달라도 산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만은 공통분모이다.


이제 백운봉암문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열심히 뛰어 내려갔다.



14 성문 코스 중에서 바로 이 북문에서 백운봉암문 코스, 그중에서도 약수암에서 백운봉암문까지의 무지막하게 가파른 코스가 가장 힘들다. 그리고 이곳이 가장 가파른 만큼 산사태가 종종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곳에서 산사태가 났기 때문에 등산로가 폐쇄되었었던 것이다. 2년 만에 다시 이 고바위 길 앞에 서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힘든 만큼 즐거움도 커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했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행복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나쓰메 소세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인고를 거치지 않는 안락은 없다고.


사실상 두 번째 산을 오르는 것 같은 이 구간은 정말 힘들다. 매일 이 길을 걸어서 아무리 익숙해지더라도 힘들 것만 같다.


백운봉암문까지 나의 최고 기록은 1시간 45분이었다. 이 정도 속도로는 아마도 백운봉암문에 이르면 2시간을 넘길 것만 같았다.




어렵사리 도착한 곳에서 얼른 핸드폰을 꺼내 기록을 살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딱 1시간 44분이 걸렸다.


물론 최고기록을 세웠을 땐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던 기록이라 오늘과 비교할 순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쉬었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고 기운이 났다. 이제 다시 용암문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용암문으로 가기 위해 날카로운 바위가 깔린 살짝 내리막길에서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다리가 풀린 건지 아니면 등산화가 많이 닳았는지 앞쪽으로 미끄러지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등산객들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나를 향해 괜찮으시냐고 연신 물어보면서 나를 걱정해 주었다. 그중 한 명은 내게 잠깐 쉬었다 가라면서 지금 이대로 출발하면 큰일 난다면서 휴식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오른쪽 무릎과 오른손바닥에 살짝 찰과상을 입은 것 말고는 특별히 다친 곳이 없었다. 정신도 멀쩡했다.


넘어질 때 날카로운 바위에 얼굴을 닿지 않게 하려고 고개를 하늘로 향한 덕분에 치아도 멀쩡했다.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일어서서 손바닥과 무릎을 탈탈 털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용암문부터 대성문까지는 별로 힘든 길이 아니었다. 그리고 용암문, 보국문, 대동문과 대성문 이 네 개의 성문 사이의 거리는 촘촘한 편이어서 금방 도착했다.


그런데 용암문에 도착하면서부터 내리던 비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대성문까지 가면서 온몸이 땀이 아니라 빗물에 흠뻑 젖어버렸다.


대성문에 이르자 다시 또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성문에 오르는 나지막한 오르막길에서 허벅지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쥐가 난 것이었다. 고작 8.8km를 걸은 상황에서 말이다.


그래서 잠시 쉬었다 가자면서 짐을 풀었다. 배낭에서 마지막 남은 단팥빵을 꺼내 시원한 더치커피와 함께 먹었다.


대성문은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 빗물에 젖은 몸에 냉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간 몸이 굳어버릴 것만 같아서 재빨리 빵을 먹어치우고 다시 가방을 짊어맸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차가워진 몸을 덥히기 위해서였다.


대남문을 거쳐, 청수동암문과 부암동암문 그리고 가사당암문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부암동암문에 이르면서 다시 또 양쪽 허벅지 안쪽에서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거기에 종아리 근육에서도 쥐가 나는 바람에 가파른 오르막길인 암릉을 오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이제 조금만 가면 가사동암문이고 이후로는 내리막길로 이어지기 때문에 조금만 더 버티면 완주에 다다르게 된다며 스스로를 달래주었다.


그렇게 근육 경련과의 사투를 벌이고 곤욕을 치러 가며 가사당암문에 무사히 도착했다. 가사동암문에서 내리막길이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가니 산 중턱에서 커다란 나무의 우듬지 위로 황금색의 이상한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거대한 불상이었다.



훤효봉에 오를 때마다 아주 멀리서도 거대한 불상이 보이는 사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사찰에 가 본 적 있어?"라고 물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아니, 난 저기가 어딘지도 몰라"라고 답해주곤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이 바로 숱하게 걸었던 14 성문 코스에서 내려오던 곳에 있던 법용사라는 사찰이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사연을 뒤로하고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중성문에 이른 뒤 다시 대서문을 향하기 위해 뒤로 돌아섰다.


중성문에서 대서문까지 16분이 더 필요했고 대서문을 지나 다시 출발했던 원점으로 회귀했다.


2년 전에는 이 코스를 3시간 54분 만에 완주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오늘은 4시간 37분이 걸렸고, 완주하기 위해 14분의 휴식시간이 필요했다.


뒤쳐진 기록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주했다는 성취감에 도취된 채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날씨가 선선해지면 다시 또 오겠다는 기약을 남기고 북한산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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