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인생의 하반기란 모두 상반기에 축적된 하나의 습관일 뿐이라는 말이 사실이군요."
어떻습니까? 인생의 상하반기를 구분하는 선은 각자에게 맡기기로 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말씀해 본다면 이 말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게 될까요?
저는 오늘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서 축의대를 맡게 되었습니다. 사촌 동생의 요청으로 하게 되었는데요.
결혼식장에 오기까지 지하철 안에서 읽었던 소설에서 이 문장을 마주 보게 되는 순간 철렁했습니다. 아, 내가 이랬던 것이었던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상하반기를 구분한 적은 있던가? 그렇다면 그건 언제였던가?
이러한 시시콜콜한 질문들이 쉴 새 없이 머릿속을 관통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정신상태에서 축의대를 맡았다면 어땠을 것 같으십니까?
반쯤은 현실세계에 발을 디딘 채 또 다른 한 발은 저 멀리 어딘지 모를 가상의 세계에 슬그머니 밀어놓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현실과 상상의 경계선 위에서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른 채 떠돌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네 인생, 왜 주어진 것인지도 모르는 우리네 각자에게 부여된 시간의 의미를 다시 또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될 따름이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결혼식장으로 가기 전에 영화 Arrival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영화는 이런 대사와 함께 시작합니다.
"난 이 날이 네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었어. 기억은 이상하지. 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 우리는 너무 시간에 매여 있어. 그 순서에..."
왜 우리는 시간, 그것도 시간의 순서에 매여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쉬운 대답은 모른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를,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모른다가 아니라 우리에겐 그런 식으로 삶이 부여되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기억은 하고 있지만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일정하게 흘러가는 삶과는 다르게 왜곡되기 마련이니까요.
네, 맞습니다. 기억은 단편적인 데다가 왜곡되고 맙니다.
보편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시간과 사건이라는 맥락으로 짚어내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투철한 정신으로 기억하려고 무진장 애를 씁니다. 남들에게는 쓸데없는 일로 비칠지 몰라도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주어진 시간에 대한 최대한의 온전한 기억은 자신에게 선물을 준 존재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겉으로 보기에 우리네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겻은 겉으로 볼 때의 일입니다. 귤 껍데기를 보면서 내적인 과실의 열매를, 그 이면을 볼 수 있는 존재에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19세기 서유럽에서는 무신론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서도 그 누구도 신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네, 맞습니다. 어쩌면 신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어젯밤에도 저의 집을 방문한 천사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저 우연적인 결과물에 블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만일 생각할 줄 아는 존재의 출현이 유기체의 우연적인 일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두뇌가 만들어내는 모든 생각도 우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연을 아주 의미 없는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이성의 출현이 우연이라면 우리의 생각도 아무런 의미를 갖기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의미 없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글로써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계신 겁니까?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불안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외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껏 인생을 즐기셔도 됩니다. 다만 그분을 인정하시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