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려야 빨리 뛸 수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그동안 등산은 수도 없이 다녔고 평소에 트레드 밀 위에서 달리기도 자주 했었습니다만, 제 의지만으로 달린 건 어제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로서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참가한 대회였는데요.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고 2시간 10분의 기록을 남겼다는 점, 그리고 개선할 점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만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던 경험이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21km를 뛰어본 소감을 남기고 싶었지만 도통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소파와 한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지난 2시간 10분 동안의 여정을 복기하며 무엇을 더 보완해야 하고 어떤 점이 문제였는지를 되짚어 보기도 했습니다.
뛰면서 들었던 생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트레드 밀 위에서 뛰는 건 뛰는 게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의지만으로 두 다리를 움직이고 상체를 세워 달리는 것이 진짜 달리기 실력이었습니다.
그 결과 앞으로는 웬만하면 바깥에서 더 연습하고 싶어 졌습니다. 악천후 때에나 헬스장에서 몸풀기 정도의 의미를 두는 것이 실전에 대한 바람직한 대비일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대회에 나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뛰다 보니 제 페이스를 조절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총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한 무리의 인파가 우르르 달려 나가기 시작하는데, 그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오버런을 하기가 십상이었습니다.
갤럭시워치에 남겨진 운동기록을 보면 초반 5km까지는 거의 시속 12km에 가까운 속도, 그러니까 저에게 있어선 최대속도로 긴 거리를 달렸던 것입니다. 물론, 평소에 시속 12km로 설정하고 트레드 밀 위에서 7km 정도를 꾸준히 달려왔긴 했습니다.
그러나 어제 제가 달려야 할 총거리는 21km였기 때문에 초반에 전력질주를 하게 되면 그 뒤로는 상당히 악전고투를 했었어야만 했습니다. 이걸 모를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한꺼번에 우르르 뛰쳐나가는 그 분위기에 휩쓸린 나머지 저도 따라나가기 시작한 결과 중반부터 체력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래서 12km를 넘기고부터는 도저히 쉬지 않고 뛸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장거리는 접근방법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던 겁니다. 사실 대회를 앞두고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천천히 달려야 빨리 뛸 수 있다"라는 모순적인 훈련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실제로 연습해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대회 2주 전에 이미 발목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회복에 전념해야만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발목 부상의 여파로 12km를 넘어가면서부터 왼발을 내딛을 때마다 너무 아파서 결국 달리기를 멈추기도 했습니다. 11km 반환점에서 방향을 전환할 때 왼발에 무리가 갔는지 반환점에서 1.5km도 채 달리기도 전에 탈이 나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래서 그 뒤로는 걷다가 뛰고, 뛰다가 걸었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반환점을 돌기 전까지 저는 제가 꼴찌인 줄 알았지만 반환점을 돌아보니 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단 걸 알게 되었다는 사실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달려온 여성 마라토너가 저를 제치고 먼저 달려가기도 했고, 경신고 마라톤 운동복을 입은 백발이 성한 마라토너가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즉 장거리를 잘 달릴 수 있는 능력은 남녀노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연습을 잘했느냐의 문제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달려야 빨리 뛸 수 있다는 말은 충분히 과학적이기도 하지만 체험으로 명백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훈련의 주요한 변화가 있어야만 하고, 그것은 곧 천천히 오래 달리기를 꼭 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첫 출전이었던 만큼 시행착오를 겪은 몇 가지에 대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우선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손수건 같은 걸 챙겼어야 했습니다.
이마에서 땀이 흐르면서 선크림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시야가 너무 뿌옇고 눈이 따가웠습니다. 그리고 땀을 닦을 수건이 없다 보니 중간중간에 달리기 루틴이 흔들리는 일이 너무 잦아 불편했습니다.
손수건보다 더 좋은 건 두건이나 밴드 같은 것을 이마에 두르고 땀이 흘러내려 시야가 방해되는 일을 막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손수건도 반바지 주머니 속에 있다 보면 금세 다 축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밴드를 이마에 두르고 모자를 쓴 뒤 스포츠 고글을 쓰고 달려야 좋을 것 같습니다. 맨눈으로 오랫동안 달리기를 하게 되면 눈부터 지치기 쉬워서 이런 불편한 느낌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사소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소 등산 다니듯이 긴 레깅스를 입고 그 위에 반바지를 덧입었는데요. 이것도 하나의 패착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거리를 달릴 때에는 굳이 레깅스는 입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또 하나 말씀 드려야 할 것은 러닝베스트입니다. 러닝 하는 사람들은 보통 베스트를 입고 연습을 하는데요.
실제 대회에 나갈 땐 웬만해선 베스트는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배에 둘러서 매는 작은 띠 같은 데에 신용카드 한 장 넣고 달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핸드폰을 베스트의 주머니에 넣고 달리는 일은 실제로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훈련할 때는 상관없겠지만, 실제 대회에서는 최대한 가볍게 하는 게 맞았습니다.
이제 풀코스 대회는 두 달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매주 천천히 오래 달리기 연습을 통해 점점 거리를 늘려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라톤 사실 그다지 재미는 없습니다. 등산보다는 훨씬 재미가 없습니다.
이 점이 조금 아쉬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