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대답

by 이각형
언젠간 이 소설에 대해서 소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직은 언제나 가만있질 않습니다. 조직도 하나의 유기체와 같아서 매일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들을 통해 진통을 겪기도 하며 성장을 이어나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인사의 변화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입니다. 공과를 평가해 올릴 사람은 올리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인류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과거와 달리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중에서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명을 이룩한 것이 결국 외부 환경에 대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건 참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속한 조직도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인사발령을 하고 있습니다. 반기마다 사람을 이동시키고 승진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임원으로 위촉된 분이 계셔서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임원이 되신 분은 승진하기 전 옆 부서의 부장님이셨습니다. 바로 옆 부서이긴 했지만 우리 부서와는 소통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아마도 신규 위촉된 임원으로서 승진에 대한 감사 인사도 할 겸, 서먹서먹해질지 모를 관계에 대한 예방접종 같은 성격도 있었습니다.

저희 팀원들과 조촐하게 점심을 먹기 시작했는데 과묵한 줄로만 알았던 분이 의외로 말씀이 참 많았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하나 이상의 심리기제가 발현된 것으로 볼 수가 있는데요.

자연스럽게 대화의 소재가 음식에서 다이어트와 식단 그리고 운동으로까지 뻗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요새 사람들끼리 건강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이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대목에서 우리 부장님께서 한 손으로 저를 가리키면서 "이 친구가 어제 말씀드린 마라톤을 하는 직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미터 가까이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도 그 말 한마디가 마치 부장님이 내 귀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놀라운 느낌을 준 것은 말하나 마나입니다.

순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제 내 차례가 되었구나 싶은 마음에 시선을 임원 분께 돌리고선 차분히 앉아 있었습니다. 결국 임원은 저에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자네가 하는 운동은 달리기라고?"

저는 떨어진 물건을 주섬주섬 줍듯이 수줍어하는 미소를 띠면서 달리기, 등산을 즐긴다고 짧게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장님은 또 "저 친구는 산에서 뛰어다닙니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아마 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식탁 위의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습니다. 점심시간에 일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것은 사실이니까요.

임원 분은 부장님의 추임새를 듣자마자 대뜸 저에게 "내가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왜 산에서 뛰어다니고 그래요? 무슨 목적이에요?"

저는 딱히 대답할 말도 없어서 그저 제 의지의 한계를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라고 짧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제 대답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면 뭔가 좀 그럴듯한 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 자리는 어차피 뻔한 얘기에 뻔한 결론이 나기 마련이어서 특별히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임원으로서 첫인사를 하는 자리에 괜스레 직원 하나가 너무 진지해지는 살풍경이 벌어지면 그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을 겁니다. 아무튼 대충 얼버무리듯이 말씀을 드렸더니 임원 분은 농담으로 "아 저런 사람은 피곤한 사람이야"라고 웃음을 띄우고 화기애애하게 화답해 주셨습니다.

그 자리가 대충 2주 전쯤에 있었습니다. 그 임원 분과의 첫 대면이었던 만큼 첫인상은 기억 속에 잘 남게 되었습니다.

제가 소속된 그룹의 임원들은 가끔 소속된 직원들에게 월요일 아침에 메일을 보내곤 합니다. 그 임원 분도 직원과의 소통과 관련해서 아마 인수인계를 받은 모양인지 오늘 아침에 첫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제목은 "출발은 다소 힘이 들죠"였습니다. 아침에 바쁜 업무를 해치우고 나서 숨을 고르면서 읽어봤습니다.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짧은 글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유독 그 임원 분의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지난 식사 자리에서 제가 말씀드린 그 답변이 사실은 되게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단 걸 깨달았습니다. 그 덕에 이렇게 쓸데없이 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잠깐 고민을 해보니 '왜 난 산에서 뛰어다닐까? 왜 나는 마라톤을 준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실제로 '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가'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들 앞에서 언제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전에 알던 스승님들을 찾아갈 수도 있고 책을 펼쳐서 스스로 그 답을 찾기 위해 홀로 사유의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지성과 감성을 균형 있게 추구하고 배우는 것들이 많아지면 보이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다 보면 눈이 밝아져 이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지고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등산과 마라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산을 다니다 보면 어떤 산을 가더라도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고 자신에게 되묻는 일이 점차 사라집니다.

5km도 간신히 뛰던 사람이 꾸준히 연습을 한 뒤에 40km를 넘게 달리게 되면 마음의 평안을 찾기도 합니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빠른 속도로 지나치다 보니 그동안 놓쳐 왔던 길거리의 작은 모습들을 눈으로 마음으로 훔치기도 합니다.

자신의 체력을 키워나가면서 자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약해지고 맙니다. 백록담을 보고 온 사람에게 연주대에 가자고 할 때 뒷걸음질 치지 않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귀찮아하는 일들을 감당하고 즐기고 있는데 두려움 앞에서 주저할 게 있겠습니까? 물론 이건 순전히 인간적인 착각과 오만에 불과합니다.

사라지는 두려움이란 건 결국 체력이 닿지 못해 시도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정도뿐입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피상적인 두려움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떤 두려움들 다시 말해 그동안 시도도 하지 못한 채 문고리만 잡고 있던 그 두려움들은 더 이상 우리의 앞을 막아 세우지 못합니다.

반면에 실질적인 두려움, 우리의 인생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하고 그 의미를 위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은 단순히 독서와 등산 그리고 마라톤이라는 취미로 해결될 수는 없을 겁니다.

해결되었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눈을 가리고 달리는 말과 같은 입장일 것입니다. 보지 않는다고 두렵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분명히 어떤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가 반드시 우리를 안내해 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요한 정적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 환경입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도 볼거리가 많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무가지 신문에 코를 박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무가지 신문이 그저 핸드폰으로 대체되기만 했습니다.

독서든 등산이든 뭐든지 간에 혼자서 자신을 탐구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자연스레 평안이 찾아옵니다. 모르긴 해도 이러한 일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자기 충족감을 느끼고 더 나아가 본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그때 우리가 과연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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