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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Jul 31. 202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각형



여가시간마다 책을 읽거나 메모장에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져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현실을 피해 책이나 글 속으로 도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업무를 마치고 필라테스 수업에 들어가기 전 남는 시간에 스타벅스에 앉아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도 지금처럼 옆자리에 있던 여자가 마시던 커피를 반바지 위로 흘려 휴지로 연신 물기를 닦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테이블 위에 익숙한 책이 놓인 걸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뻔했다.

그 책은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이었는데 몇 달 전에 나는 작위와 위선에 대한 가치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독서토론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래서 그 점이 떠올라 옆자리에 앉은 생면부지의 독자에게도 여기까지 읽으시는 동안 부자연스럽게 느낀 점은 없으셨습니까,라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책이나 글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빠지지 않고 이야기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그런 대화가 전혀 이뤄지지도 않을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는 내 심리의 기저에는 언제나 책과 글에 대한 집착이 현실도피가 아니라는 반증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다행스럽게도 여러 사람들의 글을 통해 지지를 받아 정신적 진정제를 접종한 것처럼 진정되곤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멋진 글을 유산으로 남기고 떠난 고상한 정신에 기대고 의지하고 있다는 점만 본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현실도피자로 매도한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내 몸에 입혀 매일같이 새로운 옷으로 영혼을 갈아입고 삶이라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편이다.

반대로 사회적 통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의견을 사회에 내맡긴 사람들은 사회가 흔들릴 때마다 자신도 흔들리게 될 정도로 비현실적인 안전장치에 기대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보호해줘야 할 에어백을 비싼 돈을 들여 갖춰놓았어도 정작 사고가 발생했을 때 자신은 보호받지 못하는 인생의 운전자와 같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조리 변명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들도 결국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가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면의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현재 읽고 있는 작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얘기이다. 고상한 정신을 배우기 위한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은 바로 그와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하다.

빙의되었다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쓸 때마다 어떤 친구들은 지금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맞추보려고 시덥지 않은 장난을 치기도 한다.

한 번은 철학책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는데 붉게 물든 석양의 그림을 보고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림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림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내게 전해준 이야기들을 모조리 기억해 놓고 환상에서 깨어나자마자 펜으로 옮겨 적었다. 그랬더니 그 글을 읽은 친구가 내게 지금 문학을 그중에서도 시를 읽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

내가 문학과 비문학을 읽고 있을 때마다 쓰는 글들이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면서 자신 있게 지금의 나는 시를 읽고 있다고 당차게 선언했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그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스페인의 한 철학자에게 내 모든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문학을 읽고 있을 때에는 평소보다 감성적인 스케치가 쉽게 나오곤 했다.

남자인 내가 여심의 저변을 섬세한 터치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연에 대한 묘사가 달라졌다.

심리의 변화라든가 심리적 기저를 자연현상에 빗대어 설명하곤 했다. 그때 주로 등장한 사물은 바람이었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나를 사로잡곤 했다. 숲 속에서는 소리로, 능선길 위에선 정면에서 나를 맞이하느라 피부의 결마다 흔적을 남기고 스쳐가는 물리적 속성으로 자신을 주장하고 존재를 증명했었다.

그때의 나는 시선을 앞에 고정시킨 채 어떤 환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마치 바람이 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내게 말을 걸고 있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힘찬 걸음으로 앞장서던 내 몸은 영혼의 명령을 받아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길가에 작은 관목을 여린 손으로 쓰다듬던 바람이 내 귓볼에 작은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제부터 당신의 생명은 내게서 시작합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나는 다시 태어났다. 다시 눈을 뜬 나는 앞에 펼쳐진 광경에서 한치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 앞에 바로 당신이 서 있었으니.

지금까지 고개를 들어 그 들판으로 향했던 시선은 어느새 전화 벨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새의 선물을 읽고 있던 옆자리의 여자는 어느새 빈자리를 남겨놓고 총총히 사라졌다.

오늘 밤 별자리엔 가장 크고 밝은 별이 홀로 달빛을 내게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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