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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Jul 30. 2023

이기적인 너무도 이기적인 #3



나는 부족한 설명보다는 이해가 될 때까지 말해주느라 한 페이지를 채우고도 넘치는 설명을 선호했었다. 이처럼 충분한 설명을 갈망하던 내게 세계는 이해하고자 하는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사물로 넘쳐나는 집합체와 마찬가지였다.

비록 설명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말로 전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침묵보다 길고 긴 설명을 원했던 것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환한 대낮에 길을 걸을 때와 다르게 한밤 중에는 은빛의 달이 떠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로서는 태어날 때 신에게서 선물로 받은, 알고자 하는 본능에 충실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가는 일은 내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밤하늘에 별빛을 붙잡고 걷는 사람은 본능에 충실한 인간처럼.


밤하늘의 별빛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항상 무언가 하고 있어야 했고, 그 무언가를 행하면서 누군가가 되어야만 했다.


만일 인생이 역설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러한 삶을 얻기 위해 나는 그 어떠한 노력을 사전에 기울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토록 기투된 삶에 전념하도록 요구를 받는 우리는 한순간도 나태해질 수 없다. 여기서 성실한 삶이란 한없이 늘어진 태도(허송세월)를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신적 삶이 충만해지도록 온 신경을 기울이라는 절대적 요구사항이다.


대상을 막론하고 무차별적인 이러한 절대적 요구 앞에 놓인 우리는 순결함과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행히 우리에겐 의무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동안 발견해야만 하는 자아라는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우리는 세계라는 무대에 서서세계를 조망하고 있다. 세계를 탐험하는 우리에게 사랑이 동력원으로 주어졌으며, 긴 시간 동안의 위로를 사랑에서 얻도록 허락을 받았다.


삶이라는 실존적 요구사항에 대응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사랑을 추구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안타깝게도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배가 부른 사람이 음식을 찾지 않듯이, 내면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사랑할 대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삶을 선물로 받은 셈이었다.


각자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삶을 삶답게 만드는 길은 곧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과정과 같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자는 반드시 자신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자신을 이해하기 전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일찍이 키에르케고르도 무한한 존재를 이해하는 일이 유한한 존재에겐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었다.


삶의 속성이 무엇을 행함으로써 나 자신이 되어가는 길이라면,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 어떻게 완성해 나가냐는 문제와 같다.


이처럼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야 하며 그를 바라보게 된다.


지구상에 태어난 첫 생명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감각이었던 촉각을 이용했다. 고등생물로 진화한 인간은 가장 늦게 진화한 기능 중 하나인 시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인간에게 시각, 본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본다고 생각하는 그 행위에 우리의 존재적 갈망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기 위해 상대방의 모습 중 무엇을 보는지에 관한 질문은 곧 그의 본질적 갈망이 반영된 것이 과연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질문은 단순히 미학적 취향이라든가 호오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만일 이와 같은 삶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볼 때 무엇을 보냐?"는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이 질문을 통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존재적 갈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자가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조건으로 "모든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다독이 이해와 통찰력을 높여준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 말은 곧 책이 남을 이해하기 위한 돋보기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책에 관한 흔한 환상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하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을 이해하고 동시에 세계라는 공간에 속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도구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의무일 것이다.


이해와 통찰이 독서와 갖는 관계에 관해서 다루기 위해선 내게 할애된 지면이 부족할 뿐더러 내게는 아직 그만한 능력이 없다.


결국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실행적인 그 무엇이다.


실행적인 그 무엇이 실제로 이미 활발하게 그 행위를 이어가고 있다면, 자신의 행위가 향할 대상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실행적이어야 하냐는 것이다.


삶, 살아가는 과정은 나 자신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다. 나를 발견하는 것은 나의 모습을 온전히 찾아가는 여정과 다르지 않다.


삶의 속성이 역설이라면,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완성하도록 동참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완성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촘촘한 역설적 관계에 놓인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안정감이라는 낙하산을 매고 단단한 대지 위에 두 다리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숨겨진 삶의 구조를 파악한 사람만이 온전히 삶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독자 중에서는 사랑과 삶을 굳이 이렇게까지 어렵고 장황하게 설명했어야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저 감성적이거나 정서적 측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경험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적 설명이라든가 철학적 논증으로는 사랑의 본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19세기 이후로 모든 영역에서 포퓰리즘이 승리를 거둔 덕분에 갖게 된 잘못된 인식이 있다. 고귀한 예술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해야 한다는 인식인데 이만큼 잘못된 것도 없다.


이는 '진리는 단순하다'라는 옛말처럼 틀린 말이다. 고등수학만 하더라도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 그처럼 복잡한 것도 흔치 않다.


예술로 하여금 우리의 의식이 가장 게으르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의 수준에 맞추기를 바라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예술을 하찮은 우리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세기 예술에서 포퓰리즘이 승리했을 때 예술은 가장 하찮은 인간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그래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예술이 지배적이었다.


20세기의 대중문화가 전파한 사랑에 대한 지배적 관념도 마찬가지였다. 키치라고 불리는 모조품 같은 사랑이 사회에 널리 퍼졌다.


사랑은 숭고함 없이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이토록 사랑에 이르는 길은 어려운 것이다.


스피노자도 에티카에서 이 어려움을 분명히 밝혔다.


"내가 이제까지 설명했던 것처럼 여기로 이어지는 길이 몹시도 어려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찾을 수 있다. 그 길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으므로 분명히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구원이 손에 넣기 쉽고 그래서 커다란 노고 없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못 보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모든 고귀한 것들은 그것들이 보기 드문 그만큼 힘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모두 다 같이 동일한 출발선 상에 놓인 존재이다.


단지 누가 더 빨리 깨닫고 그러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맛보게 되는지만 달라질 뿐이다.


결국 우리네 삶의 목적은 여기에 숨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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