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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ug 02. 2023

최은영, 밝은 밤

8월 1일이 되자마자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보름 여를 남겨두었지만 정모 독토 책을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으며 시간의 속도가 부쩍 빨라졌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당일 특송을 통해 토론 도서를 구입했다. 퇴근하고 집에 가보니 현관문 앞에 책이 도착해 있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서부터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고작 이십여 페이지를 읽은 것이 전부라 특별히 서평을 남길 만한 것이 없다. 더군다나 현재 독서클럽의 분위기는 토론 당일 활발한 토론을 위해 가급적 말을 아끼는 터라 이 글에서 언급할 수 있는 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비록 이 글의 제목을 토론 도서의 제목과 동일하게 선택했지만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말할 건 없다. 대신에 이런 얘기를 늘어놓을 생각이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프루스트의 작품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2023년을 잃어버린 시간을 재독 하는 특별한 시기로 삼았다.



매년 나는 한 해 동안 읽어나갈 특정한 주제라든지 분야를 결정하곤 했다. 예를 들어 자유의지에 대한 관점을 갖고 싶을 때에는 자유의지를 다룬 여러 분야의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또 때로는 작가 한 사람을 정해놓고 그의 책을 여러 번 읽기도 했다. 만약 그 작품이 너무도 탁월할 경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바로 첫 페이지로 돌아가 연이어 두 번을 읽어버리고 했다.



그런데 보통 나는 아침엔 비문학을 해질 무렵에는 문학을 읽는 편인데 이 습관도 겨우 2년 전부터 몸에 베기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책 한 권을 붙잡고 있으면 그 책에 집중하느라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그러다가 독서에 관한 책을 읽던 도중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 최소 4권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런 일이 매우 생소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나도 한번 시도해 보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은 많아야 2~3권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책을 읽을 때 언제나 비슷한 수준의 집중력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환경적 요소나 심리적 상태에 따라 집중력이 오락가락하는 편이다.



흐트러진 집중력을 재정립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는데 평상시 하는 방법과 절박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평상시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때 나는 집중력을 올리기 위해 머릿속으로 어떤 이미지를 연상하곤 한다. 그 이미지란 나의 두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집중력을 발휘하는 신체기관인 정신의 하이브, 뇌의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연상하고 나면 집중력이 다시 올라오는 것이었다.



절박할 때 사용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한 실용적인 뇌과학에서 단서를 잡고 따온 것이었다. 절박한 순간에 사용하는 방법이니 뭔가 대단한 것일 거라고 기대하는 분들이 얼마간 계실 것 같다. 하지만 매우 단순한 방법이라서 이 자리에서 밝히긴 조금 민망할 정도이다. 



아무튼 이런 식의 방법을 통해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억지를 부려가며 동시에 2~3권의 책을 꾸역꾸역 읽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어제까지 읽고 있던 프루스트를 덮어버리고 오늘 아침부터는 독서토론 도서인 최은영 작가를 읽기 시작했다. 



프루스트의 글에 비해 최은영 작가의 문체는 사실 무게감부터 시작해서 매우 가볍고 의미라든지 분위기도 매우 달랐다. 



프루스트의 문장은 19세기에서도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출판사에서 문전박대를 당했을 정도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난해한 문체로 시작하고 끝난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한 문장을 읽고 나서 곧바로 다음 문장으로 이어나갈 수가 없다. 어렵기도 하지만 그 뜻이 굉장히 깊고, 작가의 시선이 반영된 문체이다 보니깐 그 시선과 눈을 맞추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한참을 곱씹어 봐야만 한다.



그러나 최은영 작가의 문체는 그냥 눈으로 훑어만 봐도 된다. 대신에 최은영 작가의 문체는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문장은 눈으로 읽고 시선으로 다가서서 이해해야 한다. 반면에 최은영 작가의 문장은 마음에 남겨진 흔적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사실 이러한 문체의 차이는 시대적 요구사항에 부응한 작가적 노력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건 취향의 차이라고들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문체의 시대적 차이 대한 나의 생각을 여기서 밝히기엔 너무 내용이 벅차고 길기 때문에 단순히 취향만의 차이는 아니라는 점만 분명히 하고 싶다.



아무튼 나는 주로 읽는 책들이 100년 전의 작품인 경우일 때가 많다. 이런 나의 고집스러운 습관은 현대작가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작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낭만주의 작가들은 고전주의 작품들을 읽고 성장했다. 그래서 낭만주의 작품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선 고전주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작가도 마찬가지이다. 실리주의적이면서도 낭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현대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현대작가들의 관념의 뼈대를 이룬 그 무언가를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최은영 작가의 작품을 이제 고작 20여 페이지를 읽은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딱히 할 말은 없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은 마치 서리를 하려고 과수원에 들어간 사람이 파수꾼의 눈치를 보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다만 2023년 들어 한국 문학을 여러 권 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왜 한국 문학이 읽히는지 그 힘의 원천 중 하나는 알게 되었다.



한국문학은 그 나름대로 특수한 속성이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어떤 영상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만큼 몰입도가 높은 편이어서 삶의 시름을 잊고 등장인물의 희로애락에 빠져들게 된다. 물론 급물살 타는 듯하는 감성적 몰입의 가능성이 과연 예술작품에게 기대할 진정한 효익인지에 관한 얘기는 여기서 하지 않기로 하자. 여기서 또 그런 얘기를 꺼낼 순 없는 법이다.



이러한 감수성의 몰입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작품을 읽게 되면 순식간에 현실적 감각이 마비되고 현실에서 멀어져 어떤 거리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에 작중 인물 바로 뒤에서 그를 따라다니며 같은 숨을 들이마시며 함께 웃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현실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작품과의 거리는 사라져 현실을 잊게 하는 매력이 바로 한국문학의 그것이다.  



퇴근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퇴근길 위에서 최은영 작가에게로 손길이 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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