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각형 Jan 26. 2024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겸손


얼마 전 회식 때의 일이었다. 정년퇴직을 앞둔 최상위직급자를 위한 송별회였다.



직원들이 아쉬움을 삼키고 석별의 정을 선물에 담아 전달해 드렸다. 그리고 답사로 퇴직예정자께서 감사의 말을 직원들의 마음에 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여러분,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 흐름에서 볼 때 저도 떠나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이젠 강타자의 자리는 4번이 아니라 2번입니다."



아무리 퇴직예정자이지만 최상위직급자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메이저리그에서 강타자의 위치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4번에서 2번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을 듣고선 정신이 번뜩였다.



머릿속에서 재빨리 최근 메이저리그 소식을 검토해 봤다. 그 결과 LA 다저스로 팀을 옮긴 오타니가 타순 라인업에서 2번으로 소개된 스포츠 뉴스가 생각났다.



오타니는 따로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명실상부 메이저리그 강타자이다. 2번의 MVP를 수상한 데다가 투수겸업까지 가능한 만화 속 주인공이 현실화된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다저스에서는 왜 4번의 자리가 아니라 2번의 자리로 소개되었을까?



실제로 전통적인 타순 라인업에 따르면, 매년 40개 이상의 홈런포를 가동할 수 있는 거포를 4번이 아니라 2번에 넣는다는 것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선택을 한 팀이 비단 LA 다저스만의 전략은 아니었다.



2022년 아메리칸리그의 MVP를 수상한 NY 양키스의 애런 저지를 방점으로 두고 타순을 짠 사례를 보면 다저스와 비슷한 전략을 선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인 사례와 다르게 짜인 이유는 바로 개인이 아니라 팀 전체의 공격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강타자는 4번이 아니라 2번에 세우면 상대투수가 오타니를 피할 경우 3번과 4번 강타자를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팀 전체의 공격력이 배가 되기에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퇴직예정자께서는 시대가 변해 강타자의 자리도 2번으로 올라왔다고 전했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러한 오류의 원인을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해한 데에서 찾는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역사적 흐름을 거치는 동안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원인과 결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인과관계에 예민해졌다.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뇌구조가 생존본능에 따라 설계해 놓은 것이 바로 인과관계에 대한 파악이라고 여겨도 될 정도이다.



2022년 옷차림이 가벼워지기 시작할 무렵 미국이 급격히 상승하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빅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많은 부동산 전문가들이 금리상승의 여파가 부동산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 거라고 예상하던 시기였다.



당시 점점 무르익고 있던 고금리시대의 고통에 관해 최상위직급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30년에 가까운 사회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가까운 미래에 불어닥칠 경제 한파를 경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나 또한 상당히 공감하고 동의를 표해가며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퇴직예정자께서는 이 말을 힘주어 강조하시는 바람에 나는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금리를 올릴 필요가 없다. 왠지 아냐?"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의 대답을 목놓아 기다렸다. 과연 어떤 번뜩이는 재치 있는 혜안이 나올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금리를 올릴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걔네들은 달라를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야."



난 정말 여기서 기겁을 하고 말았다. 과연 이런 경제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확신에 가득 찬 거시경제 전망을 내놓을 수 있는지 의구심이 가득 차올랐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가파른 물가상승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은 "이미 활성화된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을 멈추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시장에 추가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으로 뜨거운 팬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다. 따라서 퇴직예장자가 말한 것처럼 인플레이션을 늦추기 위해 the Fed의 금리인상 단행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어떤 식의 논리적 흐름으로 이런 주장을 펼친 것일까? 화폐발항 권한과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금리인상이 과연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결시키 만한 고리가 없다. 대신에 이번엔 역의 인과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이미 뜨거워진 시장에 화폐를 공급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더 부추기는 관계만이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the Fed가 open market을 통해 시장에 손길을 뻗치는 방법은 크게 볼 때 세 가지에 불과하다.



금리 수준의 결정, 지급준비율 그리고 국공채 발행/매입이라는 주요 수단 뿐이며 이 중에서 화폐발행과 관련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달러화의 발행은 the Fed가 직접 하지 않는다. 미국은 조폐공사를 두는 대신에 HSBC와 같은 상업은행 네 군데에 발행기능을 위임했다.



이처럼 무의 관계에서 인과관계를 끌어낸 퇴직예정자의 혜안은 이토록 놀라운 것이다. 과연 그는 자신이 그러한 발언을 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물어보면 성내거나 부인하기 바쁠 테니 불필요한 수고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글을 여기까지 읽은 사람 중에 누구는 이런 나를 비난할지 모른다.



당신은 얼마나 삐뚤어진 인간이기에 퇴직예정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펼치지는 못하고 이런 비판만을 남기느냐고.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의 권위나 자긍심에 어떤 상처나 흠집을 내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가 입버릇처럼 떠벌리고 다니던 자신만의 훈장과 사뭇 대조되는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인지부조화 현상을 다시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해왔다.



"우리 조직 1만 2천 명 중에서 나는 3대 천재로 불려 왔다."라고.



이 문제적인 한 문장 안에는 두 가지의 관점에서 모순을 지적할 수 있다. 문제가 실제적 문제가 되기 위해선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천재라는 용어의 정의에 대해서 나눌 이야기가 있다. 모름지기 천재라면 사후 백 년 뒤까지 그 사유가 명맥을 유지하고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그저 살아 있는 동안에 천재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면 이는 실존적 절벽 앞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실존이 존재의 증명을 위해 철두철미한 전철을 밟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겸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스스로 천재라는 칭호에 휩싸인 채 충족적 삶을 영위해 나간다고 믿는다면 이는 인지부조화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후설에 따른다면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산다고 상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스스로 추구하고 탐구할 지성을 지니고 있다고 자각했다면 우리는 언제나 고개를 숙여만 한다. 그토록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라리의 관점처럼 만일 불완전한 존재가 진리추구를 믿는다면 시행착오를 게임의 일부라고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의 무대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계학의 렌즈를 빌리게 된다. 5천만 명의 모집단에서 샘플을 취해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라면 그 샘플의 개수는 최소한 이십만을 넘겨야 한다.



그런데 고작 1만 2천 명이라는 샘플 안에서 본인이 천재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해서 그 얘기에 취해 있다면 그건 헛된 세월을 보낸, 유아기적인 삶에 머물러 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자기성찰이 가능한 주체만이 누리는 축복이자 삶의 멍에이다.



따라서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들은 숙명을 받아들이는 한편 물리적 현상의 촉발 기제가 비물리적 존재이자 우주적 지성에서 출발했다는 걸 깨달아야만 한다. 이러한 차원에 입각해 한때 전 지성의 세계를 지배한 것처럼 보였던 물리학이 철학 앞에서 다시 고개를 숙였고, 철학은 다시금 언제나처럼 신학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러니 자뻑이 아무리 우리 삶의 근거라고 이외수 작가가 외쳤지만 유한한 존재라는 입장을 여실히 깨달았다면 그렇다면 고개를 떨구는 것이 정답이다. 나라는 실존 은혜롭게 정립한 존재는 저기 저 멀고도 가까운 곳에 있는 그분이다.



그러므로 독해지지 말자. 대신에 마음을 가볍게 하면서 동시에 손길을 뻗치자.



제발 구원해 달라고. 답을 못 찾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자.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무의미하다.


그리고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나만의 통찰이 아니다. 내게는 그저 천재라는 거인의 어깨에 앉은 덕분에 세계를 바라보고 그 어깨 위에 작은 돌맹이 하나를 올려 놓은 보잘것없는 의미에 불과하다.


이것을 이어받을 후배들이 기대된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당신들이여, 불쌍히 여김을 바라고 또 바랄 지어다. 당신들은 편혐함에 휩싸인 상황에 불과한 자신의 입장을 인정해야만 한다.

작가의 이전글 친숙한 표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