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의 땅, 척박한 한반도에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사한 한강 작가를 기리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국가적 경사가 10월 11일에 따스한 봄볕처럼 우리 곁을 찾아왔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을 만큼 의외의 사건이었다.
그동안 읽을 만한 문학 작품을 고르는 데 있어서 한 나라의 문화권이 품고 있는 다채롭고 다양한 사유를 평소 하나의 기준으로써 적용했었다. 또한 한글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동일 문화권의 한 구성원으로서 한국 작가의 얕은 철학적 담론에 익숙했던 때문에 한강 작가에 대한 기대감을 암탉이 알을 품듯이 품 속에 지니고 있던 나에게는 드디어라는 부사가 첫마디를 장식할 정도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로 만나는 사람마다 노벨문학상에 대한 소감을 나눌 때 나는 줄곧 이렇게 말했었다.
"한국 작가의 수준을 얕잡아 봤었지만 수많은 한국 작가 중에서 만일 노벨재단에서 눈여겨 볼 만한 유일한 작가가 있다면 그분은 단연코 한강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나의 한강 작가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은 2016년부터 품고 있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당시 함께 문학을 읽었던 지인들에게 이런 의견을 밝힐 때마다 명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개인이 밝힌 소견이라며 묵살당하기 일쑤였었다.
또한 항간에는 이런 얘기도 있었다. 한국 예술이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 건 번역의 한계라는 것이었다.
최근 노벨상을 수상한 문학 작품을 탐독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우리나라 문학적 예술성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오해를 전 국민이 공감대로 지니고 있었던 것은 순전히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와 같은 예술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예술이라는 장르를 우리는 어떻게 단언하며 정의를 내릴 수 있냐는 문제에 골몰하지 않는다면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는 감정이나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인 것이다. 존재는 어떤 하나의 공통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개별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보편자의 선험성 덕분인 것이다. 70억 인구가 태양이라는 하나의 에너지원에 의존하고 그것을 하나의 근원이라고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차원의 문제이다.
인류가 아무리 예술을 순수하게 발전시킨다고 하더라도 예술은 인간이 지닌 존재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예술은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문제의 발견과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시선,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소수의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고차원적인 관점이 바로 한강 작가가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 무엇인 그것이 다양하고 다채로워질수록 그 문화권은 풍요로워진다.
만일 이상적 진리를 믿는다면 그는 기필코 가난하고 차가운 진리가 아니라 풍요롭고 따듯한 진리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보편자 아래에서 모든 개별자들은 비로소 구원을 얻게 된다.
구원이라는 표현을 굳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이 지닌 의미가 충만해질 때 구원은 실현된다.
따라서 한강 작가는 척박한 한반도 이남 땅에서 구원을 실현한 첫 인류와 같다. 다만 우리가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사실은 절대다수의 국민이 책을 읽지 않아 지팡이를 잃어버린 맹인이 더듬더듬 기어가는 것 같은 현실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빈약한 정신적 영토에 한 줄기 햇살을 선사한 한강 작가에게 감사와 용서를 동시에 구하고 고개를 숙이며 붓을 내려놓는다.
이교도의 땅에서의 순교자 탄생은 대경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