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각형 Nov 05. 2024

서울시의회의 "바짝"



서울시의회에서는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한 시민들과 상당한 거리감을 느꼈는지 "바짝"이라는 표어로 광고판을 제작했다. 이러한 서울시의회의 노력은 비록 자기반성에서 시작한 것일지 몰라도 실상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바짝"이라는 형용사까지 동원했는데 이 표현은 누가 보더라도 시민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기 위해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목소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눈높이는 거리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만일 시민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기 위해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이는 그다지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 단순히 듣는다는 행동을 넘어선 경청이라는 행위를 하고자 하는 것일지라도.

눈높이와 바짝은 높이와 거리라는 다른 차원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과 동일한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명예든 권력이든 물질적 보상이든지 간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속내이자 갈망의 속성을 필연적으로 감추게 된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도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산을 철저히 숨겨야만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변증법적 자연법칙에 기반한 것이다. 따라서 서울시의회가 손에 쥔 권력의 정당성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장기집권을 추구하기 위해 시민과 함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들은 실재와 본질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실존만 꾀한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실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얻어낼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출 때에 발생하는 일이다. 인간이 세우는 계획은 언제나 한여름밤의 꿈처럼 하룻밤도 넘기지 못하는 유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서울시의회가 진정으로 겸손하고자 했다면 "바짝"이라는 근접성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해는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자 그 사람과의 거리를 좁힌다고 해도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해의 참뜻이다.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머리로 이해했다고 해서 결코 이해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서울시의회는 가식적이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구호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다시 말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올바른 방향도 알지 못한 채 떠도는 나그네에 불과한 것이다.

실재적 삶의 양태를 파악하지 못한, 실재적 세계를 탐구하고 연구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 구성한 단체가 서울시민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선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만큼 서울시의회뿐만 아니라 서울시민들도 철저한 성찰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한 사람들이 서울시민들의 대리인이고, 그러한 대리인들을 선출한 사람들도 바로 우리인 것이다.


민주주의가 중우정치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의 이전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