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결혼해요, 라고 회사에 말하자마자 폭탄이 터진 것처럼 모두들 물어본 첫 마디가 남자친구 있었냐,였습니다.그렇습니다.이 이야기는 거의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쁜 워커홀릭으로 살다보니 어느덧 연애는 뒷전이 되어버렸고, 연애할 시간이 없다, 여유가 없다 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주말에도 생방송이 많아 남는 시간에는 잠을 보충하느라 바빴습니다. 유통업 종사자이자 엠디의 삶이라는 것은 주말도 없었으니까요.
결혼해서 인생 망친 여자는 있어도 결혼 안해서 인생 망친 여자는 없어-
라고 으른들은 농담삼아 우스갯소리로 비혼도 나쁘지 않다며 얘기하기도 하기도 했더랬습니다.
(물론 말씀 주신 분들도 완전 농담, 다들 잘 사시지만)
하지만 사실 저는 결혼을 꼭 해야할 이유는 없다,라는 쪽에 실제로 가까웠습니다. 일단체력이 없었어요. 연애도 시간과 체력이 있어야하는데, 집에 혼자 누워있는 게 좋더라고요. 한편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 후회하느니 이미 나의 인생은 충분히 바쁘고 꽉 차 있었다고 생각했고요.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말에 100% 동감했습니다. (사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연애를 못한 공백기가 길어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사회생활을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일상은 루틴화됩니다. 늘 만나는 사람들과 일정한 주제들만 비슷한 시간에 이야기하는 일상의 반복들. 어느덧 행동반경이 좁아지고, 집,회사만 반복하다보니 연애조차도 어디서 해야할 지 모르는 지경이 되었죠. 소개팅은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알음알음받던 소개팅도 어느 순간 고갈되어 버렸습니다.이 지점이 되자 슬슬 불안해지더라고요.
연애를 하고 싶다면 제발 여기 저기 좀 다니고 그래.. 너는 집가서 잠만 자잖아!
친구가 해줬던 말이었습니다. 맞아요, 회사에서만 썩히기에는 젊음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조금만 찾아보니 다양한 모임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정말 많았어요.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로 만날 수 있던 소중하고 즐거웠던 기회들!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하면 더 다양한 동아리 활동들을 해보고 싶네요.
실은 저는 원래도 모임 마니아였습니다. 대학시절부터 동아리 활동도 꽤나 열심히해왔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직장인 동호회나 독서모임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설렘과 에너지가 좋았기 때문이죠. 바쁘단 핑계로 너무 루틴한 삶에 갇혀있는 것 같아, 연애가 주 목적은 아니었지만 자기계발 목적으로 다양한 모임을 열심히 나갔어요. 마치 쳇바퀴같은 회사생활에 대한 반대급부로 보상심리가 들었다고나 할까요? 새로운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일상에 활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인연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우연히 mbti에 대한 과몰입이라는 주제로 똘똘뭉친 직장인 mbti 동호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ESFJ, 남편은 ISTJ. 처음에는 딱 보고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나랑은 정말 다른 사람, 이성적으로는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하필 그 남자와, 운명의 장난처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우리 MBTI 동호회 멤버들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MBTI라는 것이 막 유행하기 시작할 때 과몰입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 그랬고 다들 등산을 좋아했던지라, 우리는 금세 산악동아리로 변모했습다. 산을 좋아하는 7명이 뭉쳐 주기적으로 등산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 대학 시절 지리산 종주까지 다녀오며 산악 동아리에 잠깐 몸담았던 제가 여기서는 꼴지일 정도로, 다들 운동과 등산에 진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일 년 넘게 오래보아온 좋은 동아리 오빠였습니다. 남편의 집은 공교롭게도 제가 다니던 직장으로부터 5분 거리에 위치해있었고, 제가 주말 출근이나 야근을 해야하는 날에는 아는 동네오빠일 뿐인 남편도 꼭 심심하다며 그렇게 우리 회사 주변을 얼쩡거렸습니다. 마침 회사 근처라기에 시간 떼울겸 둘이 만나서 커피나 한 잔 한 것이, 앉은 자리에서 다섯 시간 넘게 수다를 떨게 되었고요. 알고보니 MBTI 이야기 말고도 등산부터 독서에 대한 관심, 인생에 대한 가치관까지 우리는 참 많이 닮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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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저도 많은 경험들을 통해 성숙해져 있던 시기였다.
연애를 할 때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를 따지려고 하기보다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내 모습이 스스로 좋고 만족스러운지" 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시점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어차피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고 살면서 내가 내 스스로를 깨우치는 것도 어려운 일일텐데, 상대가 어떤지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니까, 그 사람과 함께일 때 "내 모습이 어떤지", 스스로가 더 단단해질 수 있는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 했었지요.결혼이냐 비혼이냐 이런건 하나도 안 중요했습니다. 중요한 건 그걸 해서 내가 행복하냐?였어요. 인생은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해서 많은 순간 고민의 갈림길에서 '나'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게 옳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물론 알면서도 말처럼 쉽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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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남편과 저, 우리는 친구로 알고 지낸지 1년 넘게 썸 아닌 썸을 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남자가 내 주위를 얼쩡거리는 건지도 모르다가, 알게 된 어느 주말. 둘이 만나서 이 날도 여느때처럼 다섯 시간 넘게 놀고, 저는 주말 오후 근무가 있어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이 남자는 뭐지? 늘 친구인 척 하면서 고백은 하지 않는 남자. 잘 놀다가 홀로 회사로 오는데 갑자기 화가 나서, 불쑥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 오빠 저 좋아하죠?"
남편: "....아닌데요."
나: "맞잖아요 (울컥했음.) 아님 왜 맨날 만나자고 해요."
남편: " 잘 모르겠습니다."
나: "거짓말마요. 좋아하잖아요. 그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1부터 5까지 중에 수치로 말해볼래요?"
남편: "음..(전화너머 남편은 웃고 있었다) 3..? 장난이에요. 좋아합니다. 언제쯤 일 마칠까요? 이따가 만날 수 있나요?"
그렇게 우리는 2시간 뒤인 한밤중에 회사 앞 벤치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남편은 등산복차림이 아닌, 멀끔한 코트차림에 왁스까지 바르고 한밤중에 향수까지 뿌린 채 나타났어요. 잔뜩 긴장해있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나름 멋을 부린다고 코트에 자기가 좋아하는 로켓모양 브로치를 달고 나왔는데, 그것조차도 너무나 남편스러워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워낙 경계심과 조심성이 많고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던 남편인지라, 오랫동안 저에게 호감은 가졌지만 당연히 이루어지지 못할거라고 생각했고 고백은커녕 친구의 자리로 만족(..)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날 남편은 불쑥 "가족이 되어줄래요?"라고 얘기했고 우리는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겨우 일년 반 된 신혼부부로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의 별 거 아닌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