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기형도

by 장준영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 -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 흔해빠진 독서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빈집 -



믿어주게.

나도 몇 개의 동작을 배웠지.

변화 중에서도 튕겨나가지 않으려고

고무풀처럼 욕망을 단순화하고

그렇게 하나의 과정이 되어갔었네.


-종이달-





지난밤 H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다 기형도 이야기가 나왔고 통화를 하면서 나지막이 기형도의 시를 읽었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나' 그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라 한다. 거기다 자기조차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는 자조와 탄식 앞에서 저절로 목이 멘다.

예전엔 이렇게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좋아했던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스스로를 동굴에 가두어 놓고 절망적인 상황 그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그렇다. 난 즐겼었다. 하지만 이제 밝은 빛을 바라보며 회색빛이 짙게 나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애써 떨쳐내며 밝은 모습으로 세상 밖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웃는 얼굴이 어색하지만 이전보다 인상이 순해지고 있으니 길을 걷다 '도를 아십니까'무리들이 제법 말을 걷고 있다. 귀찮지만 한편으로 인상을 비롯해 전반적인 아우라가 변해져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지금은 결혼한 옛 애인에게 기형도 시를 읽어준 적이 있다. 그것이 기형도와 나의 첫 만남이었으며 지금의 내 나이 즈음에 갑작스럽게 죽었단 정도만 알고 있었다. 작년 차 트렁크 속에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고성으로 정처 없는 독서여행을 떠났을 때 우연히 기형도를 다시 만났으며 인적 없는 해변가에서 헤드랜턴의 미세한 빛으로 그를 온전히 만났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지금의 애인에게 우연히 기형도의 시를 읽어주었으나 이제는 그 우울함을 바라만 봐도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제서야 허무와 공허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막 알에서 깨어나고 있는 새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기형도가 아닌 질풍노도의 시기를 벗어나 한껏 초연해진 간지로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여유를 지닌 시를 읽어주고 싶다.


잘 가. 기형도.




기형도
시인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했으며 84년에 중앙일보에 입사해 근무했다.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이후 독창적이면서 강한 개성의 시들을 발표했으나 89년 3월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 시집에서 기형도는 일상 속에서 내재하는 폭압과 공포의 심리 구조를 추억의 형식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로테스트 현실주의로 명명될 그의 시 세계는 우울한 유년 시절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며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시 공간 속에 펼쳐 보인다.
(출처: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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