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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04. 2023

러브레터

메밀과 팥 그리고 목련 (가제) 

https://www.youtube.com/watch?v=egP9SPQwBTs&ab_channel=Remedios-Topic

1

우연히 즐겨보는 커뮤니티에서 러브레터 lp 구매글을 보고 나서 아주 오랜만에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보았다. 1995년작 이었지만 내가 봤던 최초의 기억은 아마 세기말 혹은 21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아주 어렸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절 그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영상미와 이걸 받쳐주는 ost는 아주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오타루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2

군대에 있을 때 두 번의 겨울을 보냈다. 갓 이등병을 달고 부대에 전입을 했을 당시부터 일병을 달기까지 약 6개월 동안 새롭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에 두려움과 걱정이 의식에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마치 컴컴하고 앞날이 전혀 보이지 않았을 그때. 당시 만났던 여자 친구의 핸드폰 연결음이 러브레터 ost였다.      

이등병 시절이라 일과 후의 시간에도 통화가 자유롭지 않았던 때였고 나이가 5살이나 어렸던 선임에게 허락을 맡아 간신히 전화를 걸었다. 그녀와의 통화가 되기 전까지 길면 약 30초의 시간까지 연결음에 나왔던 이 OST를 들으며 기다렸고 간절히 그리고 애절하게 통화를 이어나갔다. 절망과 우울감이 넘쳐났던 이등병 시절에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빛과 소금은 그녀와의 통화였고 이 곡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중간 다리였다. 


3

친구에게 졸라 관심있던 아이를 소개받았고 운이 좋게 만남을 시작했다.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만난 지 3주가 채 안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오타루 갈까?” 우리는 눈을 감고 함께 오타루에 있는 상상을 했다.      


나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서 마치 <러브레터> 영화 포스터처럼 옆모습이 아름다웠던 그녀의 사진을 찍고 있다. 눈이 펑펑 내리는 적막한 밤. 우리는 숙소에서 가까운 어느 선술집으로 향한다. 나무 단창으로 된 문을 드르륵~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따스한 온기가 얼굴에 훅 끼친다. 안경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사각사각 채 써는 소리와 함께 주인장이 중저음 목소리로 짧게 오하이오, 조용조용 나직이 소곤대는 몇몇 손님들의 대화 소리, 코끝에 스치는 진한 간장조림 냄새와 세월이 깃든 노포에서 풍겨 나오는 오래된 나무 냄새, 바에 앉아서 읽지도 못하는 일본어 메뉴판과 씨름하는 나와 그녀를. 나는 상상한다.      


내가 상상하는 겨울 풍경이다. 홋카이도 어느 작은 도시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이번에 이곳으로 여행을 갈까 고민했지만 결국 푸켓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타루.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가보고 싶은 작은 로망이 있다     


4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의 <겨울 일기>에는 뇌가 아닌 감각으로 재생되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를 만졌던 손, 들었던 음악, 혀를 지나 목으로 넘어가는 어느 특정한 맛 등.     


내게도 그런 감각이 재생되는 기억이 있다. 어떤 특정한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들었던 당시 상황과 순간이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이미지로 떠오른다. <러브레터>를 들으면 철원에서 보낸 겨울이, 비틀즈의 <줄리아>를 들으면 고성 바다에서 맞은 겨울이, 드뷔시의 <달빛>을 들으면 하바롭스크의 자작나무 숲에서 지낸 겨울이. 나이 들수록 좋았던 어느 한 시절을 회상하게 되면서 기억 저편의 향이 점점 진해지는 것 같다. 이번 겨울은 또 어떤 음악과 함께 할지. 먼 훗날 그 음악을 다시 들었을 때 어떤 감각이 되살아날지. 곧 다가올 겨울의 장면은 무엇일지. 그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5.

2022년 그해 겨울. 난 지독히 쓸쓸한 겨울을 홀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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