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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04. 2023

겨울 냄새

메밀과 팥 그리고 목련 (가제) 

https://www.youtube.com/watch?v=E244Db-Cd5I&ab_channel=%EC%98%A8%EC%8A%A4%ED%85%8C%EC%9D%B4%EC%A7%80ONSTAGE


버스를 타면 항상 앉는 자리가 있다. 운전수 방향 맨 뒤 바로 앞좌석. 그날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며 음악도 듣고 가끔 술에 취했을 때는 머리를 박은 상태로 그대로 갈 때도 있다. 밤의 기운이 쌀쌀하다 못해 이제 추워졌다. 거리의 사람들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간절기 패션을 넘어 겨울을 대비하는 듯한 옷을 입고 있다.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할까? 1년 전 그날을 생각할까 2년 전 그날을 생각할까. 계절에 알맞은 영화와 책들을 보다가도 갑작스레 상념에 잠긴다.


겨울 냄새가 난다. 원래 이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표현인지 알면서도 즐겨 쓴다. 첼로의 선율과 피아노의 음률이 감정선을 건드리고, 목소리 좋은 아나운서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을 때면 이 겨울 냄새와 참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탓에 마스크를 끼고 지내느라 사람들의 눈만 바라보는 세상을 산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눈동자에 힘이 있는 사람도, 눈매가 너무 이뻐서 마스크 벗은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다. 차창에 비치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오늘은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아하니 자존감이 썩 좋지 않나 보군.’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잎]을 읽는다. 기형도는 겨울 냄새와 참 잘 어울리는 시인이다. 외로움과 무언가에 관한 갈망을 속에 품은 채 꾹꾹 눌러쓴 흔적이 보인다. 질투는 나의 힘, 입속의 검은 잎, 빈집 등 수많은 명작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내 가진 것은 탄식밖에 없어~.”와 같은 표현은 공허함이 가득 찬 이런 날에 참 잘 어울린다. 웬만해선 기형도를 멀리하노라 다짐하였는데, 부지불식간에 손에 잡히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2년 전 태국에서 사 온 와불 불상이 있다. 얼마 전 친구 k를 만났는데 그 친구 아버지가 간암 3기 판정을 받아서 굉장히 심숭생숭한 듯했다. 내줄 수 있는 게 와불 밖에 없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 잘 받으시기를 기원하며 친구에게 건네줬다. 이로써 가지고 있는 여행에서의 모든 기념품을 다 정리했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선물하는 걸 좋아한다.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사람들에게 선물했는데 대부분 당시 만나고 있던 이성이었다. 친구에게도 주고, 심지어 친구의 여자 친구에게까지 건네줘서 내 손에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다. 주고 나면 끝-이어야 하는데 가끔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 온 은으로 된 십자가 목걸이 가끔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걸 선물로 받은 친구는 불교 신자였는데 말이다. 등신.   

   


예전에 어떤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의 빈방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네가 술에 취해 혹은 외로워서 찾아오는 그런 방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들어주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네 감정의 쓰레기받기는 아니다. 그럴 거면 너의 빈방을 정리해라. 나는 너의 빈방이 아니다. 



달은 차고 기울고 계절은 또 지나간다. 내년이면 나도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선다. 인생의 한 막이 끝나고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몇 해 전에는 스물아홉을 지나 서른이 된다는 것이 내게는 꽤나 큰 공포로 다가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유무와 크기를 남들과 비교하면서 강박감을 느꼈고 서른이 되도록 아직도 뭔가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초조감 등 그런 것들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시간이 지나자 부정적인 생각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십대를 끝내고 삼십 대라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니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올라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른이 넘으면 좀 더 단단한 어른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그나저나 다가오는 차원은 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코끝에서 겨울 냄새가 진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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