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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19. 2023

제주

누워있는 남자 

https://www.youtube.com/watch?v=QB2lgkJl4LA&ab_channel=BubbaMo




적당히 즉흥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여기서 '적당히'라는 부사의 심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절대치를 매길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약속 잡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사람도 번개로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내 주변 그리고 오랫동안 곁에 있는 사람들 또한 꽤나 즉흥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좋아하는 여성상 중 하나는 나의 이런 즉흥성을 적당히 잘 받아주는 친구이며 간혹 이런 친구를 만나는 것은 꽤나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일례로 18년 말에 만났던 친구는 사귄 지 2주 만에 같이 태국을 열흘 이상 다녀왔다. 물론 그 당시 그녀와 나는 재정적 여유와 시간이 잘 맞아서 그랬던 것이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나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다녀온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굉장히 멋있다고 할 수 있다. 


8월 어느 금요일 저녁, 유라시아 대륙횡단의 인연으로 작년부터 부쩍 친하게 지내는 노아군과 술자리에서 우연찮게 나온 여행 이야기로 다음 날 오전 비행기를 그 자리에서 끊었다. 그리고 잠시 다녀왔다. 


살면서 제주를 4, 5번 다녀왔나 싶다. 최초의 기억은 내가 4살에서 5살 정도 될 무렵. 아빠, 엄마가 나를 할머니 댁에 맡기고 둘이서 제주도를 다녀오셨다. 나를 빼놓고 둘이서만 어디를 갔다는 사실 자체에 서러움을 느껴 불쌍한 할머니를 붙잡고 내내 울었던 기억. 그리고 최초로 죽음에 대해 질문을 하다가 갑자기 죽는 게 무섭다며 3명의 고모들을 괴롭혔던 기억. "준영아, 괜찮아. 넌 100살까지 살 거야.”라고 큰고모가 나를 달래주었지만, 그 당시에도 100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너무 덧없다고 느꼈던 감정의 기억. 시간이 흐른 뒤 사진 속에서 행복했던 부모님의 그 추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던 기억. 


두, 세 번째의 제주는 우리 가족이 한창 잘나갔던 초등학교 3~4학년 때 제주도를 방문했던 것. ‘오분자기’ 된장찌개와 옥돔구이가 아주 맛있었으며, 한라산이라는 소주병 자체가 육지의 그것과 달라 신기했던 점. 승마 체험하러 방문했던 곳에서 빌려주는 조끼에서 4만 원을 주웠던 점. 도깨비 도로에서 깡통을 굴렸던 점. 추자도에서 스킨 스쿠버를 하셨던 아버지가 작살로 고기를 대량 포획해서 나왔던 점. 마지막으로 톰보이라는 브랜드를 위아래 깔끔하게 입혀 멋들어진 초딩으로 엄마랑 사진 찍었던 점. 내 유년 시절의 제주. 


네 번째는 21살 방학 때 (2008년) 제주의 올레길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달리기 시작했을 무렵 친구들과 올레길을 걸었던 것. 제주도에 게스트하우스 3개가 있었을 때, 산방산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을 방문했는데 술자리에서 여행 부심 쩔었던 사람과 싸웠던 기억 등 대체로 좋았다. 


다섯 번째는 29살 때 헤어지기 직전의 여자친구를 붙잡으러 제주를 방문하였으나, 만나 주지 않아서 하루 내내 자동차 운전만 했던 최악의 기억.


비로소 여섯 번째가 이번의 제주. 제일 좋았던 점은 맛있는 거를 먹은 것도, 사람 없는 포구에서 수영을 하는 것도, 음주 후 밤에 수영을 한 것도 아닌, 처음 도착해서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노을 질 무렵의 하늘을 바라보았던 것이 가장 좋았다. 다음날 한라산을 넘어갈 때는 산스크리트 일렉트로니카와 강렬한 태양 에너지가 솟구치는 four tet의 morning side를 들었으며, 마지막 복귀 길은 귀신 나올 것 같은 안개 낀 5.16 도로를 달릴 때 영화 버닝의 ost를 들었다.      


다음의 제주는 누구와 그리고 어떤 감정을 공유하면서 보낼까?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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