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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19. 2023

새벽 1시, 찰스 h에서

누워있는 남자 

자정이 지날 무렵 마음에 어떤 파장이 있어서 그랬던 것인지, 그날 밤은 광화문을 감싸는 공기의 질감이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고 달빛조차 비추지 않았기 때문에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던 밤이다. 평소대로라면 혼자 절대 못 갈 호텔 바를 10년 만에 만난 사촌 형과 찾아갔다.       


살짝 졸린 눈을 가지고 우디 머스크 향이 나는 호텔 로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갔는데 바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떠한 표기도 없었기에 바의 입구를 찾기에 애를 먹었다.(찰스 h 컨셉이 speakeasy bar) 어렵게 들어간 바의 내부에는 고급 정장을 입은 직원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그녀에게 안내를 받은 뒤 비로소 바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두 번의 결계를 풀고 들어간 바의 내부에는 적당히 어두운 조도와 적당한 공간의 여백 그리고 그것을 채워주는 존 콜트레인의 은은한 재즈 음악이 1:1.618의 황금 비율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자정을 알리는 크고 오래된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정중앙 한가운데 윗부분을 정확히를 가리켰다. 마티니 애호가인 사촌 형을 따라 마티니를 시켰고 차갑고 묵직한 진의 날카로움이 목젖을 넘기고 식도를 지나 위에 다다르는 순간 어느새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에 시큼했던 손과 발에 뜨거운 혈류가 마치 활주로에 부드럽게 랜딩 한 비행기처럼 안정적으로 공급되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바 내부에는 손님들이 많지 않았다. 호텔 투숙객들로 보이는 편안한 차림의 커플,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사람들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사촌 형과 내가 있었다.      

 주문했던 첫 잔을 다 마시고 다음 칵테일로 김릿을 주문할 무렵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들어오는 앙상한 모습의 한 노인을 목격하였다.      


거동이 살짝 불편해 보이는 노인은 바 내부를 조망할 수 있는 좌석이 아닌 화장실 앞에 앉아 서버와 대화를 나누며  무언가를 주문했다. 나는 내심 몇 분 후 굉장히 이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자가 노인 옆에 앉을 상상을 하였지만 결국 노인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노인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티포트가 보였다. 아마 차 종류를 주문한 것 같았다. 약 한 시간의 시간 동안 노인은 화장실과 천장의 중간 지점을 바라보며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공허해 보이는 노인의 뒷모습이 꽤나 인상이 강했다. 그 모습은 마치 에드워드 호프의<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그림을 연상시켰다.       

자정을 넘긴 시간,  서서히 꺼져가는 육체의 소멸을 카페인으로 간신히 붙잡는 노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조심스레 상상을 해본다. 먼저 떠난 부인에 대한 생각일까? 젊고 아름다웠던 청춘의 시간에 대한 회상일까? 황혼의 시대, 저물어가고 막바지 다 타들어가는 촛불의 마지막 발화처럼 자신의 지난 삶을 강렬하게 붙잡고 있는 걸까? 노인의 뒷모습은 마치 파슈파니트 화장터에서 봤던, 자신의 죽음을 조용히 기다리는 힌두교 사두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고 느껴졌다.      


새벽 1시 30분, 찰스 h의 영업 종료 시간이 다가올 무렵 적당한 데시벨의 음악 소리가 슬슬 페이드아웃이 돼가고 메뉴판을 보기에 살짝 어려웠던 내부의 조명을 조심스레 살짝 밝힘으로써 내부의 손님들에게 영업 종료의 신호를 조심스럽게 알릴 무렵 한두 명씩 손님들이 나가기 시작했고 남은 사람들은 우리와 노인밖에 없었다. 우리는 끝까지 남아 노인의 이후 행동을 보고 싶었지만, 마침내  음악이 꺼짐으로써 한 시간 가량의 관음을 끝내야만 했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노인 그리고  연인들의 사랑에 대한 약속, 성공에 대한 어느 사업가의 야망 등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러 맥락들은 그날 밤 찰스h에 다 모여 있었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동시성의 원리처럼.      

그날, 광화문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더더욱 춥고 멀게 느껴졌다. 화려한 대도시 속에서의 외로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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