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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20. 2023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굿바이 류이치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사느냐 혹은 죽느냐에 관한 문제로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20대 초중반이 그러했으며 30대가 넘어서도 가끔 그랬다. 그러나 서른 중반이 넘은 지금으로서는 행복과 불행은 늘 같은 무게로 어깨 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다. 이야기로 가득 찬 그리고 경험에서 체험을 지나 지혜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 작년 장마가 끝나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시기, 해 질 녘은 짧아졌으나 오후 4시의 풍경이 아름다운 그때, 이 책을 접했다. 하지만 조그만 조약돌 하나에도 마음속의 파동이 파도가 되어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시기라 서랍 깊숙한 곳에 책을 넣어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세밑 즈음에 책을 집어 들었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차창밖에 있는 풍경을 그냥 지나치듯 책을 읽기엔 들어있는 지혜가 마치 보석 상자와 같아서 느린 호흡으로 읽었으며 또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체크해 두었던 것들을 필사하기 시작했고 대화에서 언급된 책들을 따로 찾아 읽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예가체프가 훌륭한 부암동 클럽에스프레소 한구석에서 선생의 지혜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다. 찰나 같은 오후의 노란빛과 시대의 스승이 사라졌음을 아쉬워하며.   

   

얼마 전 지인과의 통화해서 나온 내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에서 삶을 마감해요. 그러나 경험에서 벗어나 체험 그리고 지혜 더 나아가 그 단계의 최고 레벨인 nirvana로 향하는 길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직면해야 하며, 단순 지식이 아닌 경험과 영성 그리고 지식이 결합한 '지혜로운 자'로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에게 파동이 나와 보다 주변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체험을 하는 자이며, 체험을 바탕으로 자기 수행과 그에 반하는 지식을 잘 소화해 흉내 내는 것이 아닌 말끝 그리고 손끝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수업'은 김지수 기자와 이어령 선생의 2019년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다. 선생은 호흡기에 의지한 채 떨어질 낙엽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글을 쓰며 담대하게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지금껏 네거티브하고 처연한 인상을 준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 만남, 마지막 인사, 마지막 수업 등) 그러나 뒤에 아이러니하거나 제법 어울리지 않은 단어를 덧붙이면 그 의미는 새로운 희망과 동시에 결연한 의지도 나타난다. 마지막 시작, 마지막 설렘, 마지막 사랑, 마지막 희망 등.         

  

돌아가신 스승은 나에게 잘 살고 있음을 확인 시켜주었다. 어릴 적 출간한 나의 책 표지에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여태껏 이 말에 대한 스스로의 의심이 있었다. 하지만 스승의 가르침 이후, 잠깐이지만 스스로에게 칭찬하는 시간을 가졌다.  속도전이 중요한 이 시대에서 달리느라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나침반'이 내 주머니에 있었다는 것. 여행 후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나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무엇보다 스승은 내게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정오의 분수 속에, 한낮의 정적 속에, 시끄러운 운동장과 텅 빈 교실 사이, 매미 떼의 울음이 끊긴 그 순간.. 우리는 제 각자의 예민한 살갗으로 생과 사의 엷은 막을 통과하고 있다고. 그는 음습하고 쾌쾌한 죽음을 한여름의 태양 아래로 가져와 빛으로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이 책에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죽음일 것이다. 


귀와 배꼽은 탄생의 블랙홀처럼 보인다.  배꼽을 만져보게. 몸의 중심에 있어. 그런데 비어있는 중심이거든.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지.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한밤의 까마귀가 안 보이더라도 한밤에 까마귀가 어딘가에는 있어. 그렇지? 어둠이 너무 짙어서, 자네 눈에 안 보이는 것뿐이야. 그리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기도 하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 울음소리도 듣지 못해. 이게 선에서 하는 얘기라네. 한밤에 까마귀는 있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지만, 우리는 볼 수도 없고 그 울음소리를 듣지도 못해.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 탄생, 만남, 이별, 죽음.... 이런 것들, 만약 우리가 귀 기울여서 한밤의 까마귀 소리를 듣는다면,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을 느끼는 거라네.


선생님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당신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촛불도 마찬가지야. 촛불이 수직으로 타는 걸 본 적이 있나? 없어. 항상 좌우로 흔들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네.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 그게 살아있는 것들의 힘이야. 당신의 인생은 촛불과 파도 사이에 있었군요. 정오의 분수가 왜 슬픈 지 알겠습니다. 촛불과 파도 앞에 서면 항상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나. 수직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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