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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20. 2023

이제는 미련없이 비켜설 때

엄마를 부탁해 

친구 지웅이의 아버님이 환갑을 맞이하여 책을 내셨다. 지웅이에게 듣기로 처음에 작고, 가볍게 그리고 간단하게 그간의 글들을 모아 가족, 친지들에게 뿌릴 50여 권 정도로 책을 만들 예정이었으나,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 인디자인을 독학, 편집, 출간, 발행, 인쇄까지 결국 일을 내었다고 한다. 친구지만 지웅이의 다재다능함과 그 추진력을 나는 다시 한 번 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대전 출신이지만 중, 고등학교가 달랐던 지웅이의 존재는 학창 시절에는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같은 중학교 친구들이 대거 그의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나 혼자 친구 없이 마치 불모지에 있는 학교로 유배 가듯 떨어져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나의 터전을 일구어 나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그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고등학교에 대한 안 좋은 소문과 전혀 다른 학군에서 온 새로운 아이들과의 조우에 대한 겁이 살짝 있었지만, 한편으로의 오기 때문에 공부보다는 남자들과의 권력 싸움에 대한 마음가짐이 더 컸던 것 같다. 


첫 학기 때 초반의 긴장감은 어느새 누그러졌고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려 아주 잘 지냈다. 새로운 터전에서의 힘과 권력도 어느 정도 잡았기 때문에 3년 내내 나의 학창 시절은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녔다. 


내가 살던 곳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15분 정도였기 때문에 오가며 내 중학교 친구들이 다니던 학교의 아이들과 자주 마주쳤다. 그때 이상하게 하고 다니는 지웅이를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지웅이는 그 당시 유행했던 모든 패션 아이템-혀를 길게 낸 나이키 SB 시리즈, 켈빈클라인 사각 가방, 샤기 컷, 빨간 뿔테- 등 성장 드라마 반올림에 나올법한 아이돌의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 안 섞었던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 내가 유라시아를 횡단하고 늦은 군 입대를 앞둔 2012년의 여름 어느 날, 친구에게 지웅이란 아이가 나를 동경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서울대입구의 커피 빈에서 이상한 만남을 계기로 지금껏 연락하며 소소하게 지내는 사이로 발전해왔다. 


그런 지웅이가 일을 해냈고, 그의 아버지가 책을 출간 하셨다기에 조용히 그의 에세이를 사서 읽었다. 사실 나는 남의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다. 참고로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난 내 책도 한 번 읽지를 않았다. 


며칠 전 양재역에 갈 일이 있어, 오가는 두 시간 내내 아버님의 책을 읽었다. 그의 인생의 담담하고 철학적인 그리고 따뜻한 시선이 골고루 담아져 있어 아주 잘 읽었다. 예전에 지웅이가 말했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 학창 시절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에서 봄을 맞이해 안에 심었던 씨앗이 초록빛을 내며 머리를 내듯, 자아가 발현한 지웅이는 어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약간의 문제와 반항이 있었고 이로 인해 학교 그리고 파출소에 갔던 경험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런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맞았으며 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고 한다. 이윽고 대화의 단절이 지속되었다가 자신의 군 입대를 계기로 아버지께서 그 후 12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지금껏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 편지를 계기로 12년간 축적된 편지들과 그리고 본인의 삶을 둘러싼 모든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셨다. 나의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한 그의 이야기를 보면서 한 편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간접 겪었으며 이해도도 상승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베이비 부머 세대인 우리네 아버지들은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우리 할아버지들의 자식들이었고 반공과 국가 발전이라는 슬로건 아래의 냉혹했던 군사정권에서 학창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셨던 분들이다. 개인의 가치가 철저히 무시되었고 단순히 ‘먹고 삶'의 가장 기본적인 아젠다를 가지고 오직 사회적 성공을 보고 달리셨던 분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분명 3저 호황이라는 80년대 말부터, 문민정부가 시작되고 IMF가 터지기 직전인 ‘코리안 버블'을 누렸으며, 그때는 누구나 중산층이라는 달콤한 환각을 맞이했고, 그 마약의 환각이 사라지기 시작한 90년대 말부터 혹독한 고난의 시기를 몸소 겪었다. 이건 아마 지웅이네 뿐만 아니라 많은 가정도 이런 시기를 겪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도 부모님들의 지원 아래 학창시절 내내 학원을 다녔고 다른 것들은 무시된 채 공부 잘 하는 것이 가장 큰 가치였다. 


이런 부모님들과 그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훨씬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겪은 우리들 세대가 청소년기에 진입하면서 자아가 발현하여 그런 부모님들과의 엄청난 갈등을 겪어왔으며, 서로의 기대에 충족되지 못한 실망의 골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 또한 아버지와의 지독한 갈등을 겪었다. 칼을 들어 죽는다고 앞에서 자해를 한 적도 있으며, 출가한 곳에 찾아온 아버지를 만나보지도 않은 채 보낸 적도 있다. (그때 만든 네이버 아이디는 anti1960s이다.)


아버지와의 지독한 갈등으로 내가 가출이 아닌 출가를 했던 23살 때부터 지금까지 약 10년 동안 아버지와 일절 연락 없이 지냈던 세월이 벌써 5년이 흘렀다. 그런 아버지는 지웅이의 아버지처럼 종종 나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쓰셨다. 지금은 네이트 계정이 없어 그 이메일을 못 봤지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편지에서 기억하는 문구가 있다.


‘미안하다.
아빠도 인생에서 아버지라는 것이 처음이어서
 너에게 무척 서툴렀단다.’


당시 나에겐 꽤나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였던 걸로 당연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내년에 환갑이신 아버지와의 관계가 재작년부터 슬슬 좋아지기 시작했다. 몇 년 만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계기로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며, 일 년에 한두 번은 직접 찾아뵙고 있다. 작년에는 둘이서 지리산 뱀사골에서 캠핑을 같이 했다. 무지 불편했지만...


나이가 점점 들다 보니, 아버지에 대한 이해도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아버지라는 역할이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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