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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20. 2023

엄마를 부탁해

엄마를 부탁해 

며칠 전 엄마의 남편이 죽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확히 10년 만에 외가 쪽 식구들을 봤다.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시니컬한 농담을 꺼냈다. 


"우린 장례식장에서만 보네"      


원래 하루만 잠깐 있으려고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3일 내내 장례식장으로 출퇴근을 했고 아저씨가 가는 마지막 길까지 배웅하고 왔다.      


사실 10년 전 장례식장도 그렇고 지금의 장례식장에서도 나는 '이방인'이었다. 엄마의 공적 인생에 있어서 나는 없는 존재였다. 간혹 누군가가 나에 대해 물어보면 아들이라고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가정을 꾸린 새로운 터전에서 엄마는 굳이  이혼녀라고 할 수 없었다.) 동생 또한 친구들에게 "저 사람은 누구야?"라고 물어보면 사촌 형이라고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는 하지만 심적으로 서운한 감정도 없지 않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건 아빠 집에서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이혼 후 이모네 집에 잠깐 살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알고 보니 씨가 다른 동생이 생겼고 이후 난 10년간 엄마를 보지 못했다가 외할아버지 장례식장 때 아저씨와 동생까지 처음 봤다. 당시 여행을 다녀온 직후라서 머리가 허리까지 길렀기 때문에 오랜만에 본 식구들은 나의 외모를 보고 경악을 했고 나 또한 식구들에 대한 적대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내가 엄마 욕을 하면 할머니와 이모들은 아빠 탓이라며 엄마를 이해해달라고 하지만 정작 나를 이해해 주고 달래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현재도 그렇다. 이해는 온전히 내 몫이다.      


이후 그쪽 가족들과의 관계가 지금까지 미온수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며 가늘게 유지됐다. 아저씨는 조그만 샷시 공장을 운영했던 사람으로 따뜻했던 사람이었다. 나도 그의 일을 몇 번 도와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고 나이가 15살 차는 동생은 해 맑은 얼굴로 "형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당시 어린아이 눈에는 오토바이 타고 세계 여행하는 형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라며 크레파스로 그림도 그려줬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도, 동생도 싫었다. 결국 엄마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다른 성(成)을 가진 남자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소유욕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오로지 나의 엄마이여만 한다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발현인 것 같다.      

그랬던 아저씨가 2년 전 코로나로 인해 사업이 망가지기 시작하면서 집에 틀어박혀 술만 주구장창 마시다 어느 날 집 앞에서 넘어져 뇌를 다쳤다. 이후 더 이상해져 알콜 중독 치료도 받고 정신병원에도 입원하는 등 여러 재활의 노력은 있었지만 그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것 같다. 병원을 몇 번이나 탈출했고 결국 나와서 술만 마시다 죽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평생 가정주부로 살았던 엄마가 직장을 다니게 되었으며 고등학생이었던 동생도 대학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엄마의 상황도 속이 상했지만 음대를 목표로 공부했던 동생이 악기를 포기하고 험한 배달 일을 하는 상황이 너무 화가 났다. 엄마의 잘 못은 아니지만  부모로서 무책임했던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까지 한꺼번에 몰려와서 그랬던 것 같다. 난 당시 엄마한테 이런 얘기를 했다. 


"엄마가 말 그대로 엄마라면 몸을 팔아서라도 아이는 책임지라고. 나한테 했던 것처럼 쟤한테 저러면 난 연 끊겠다"     

 

화장을 하고 나서 뼈로 된 아저씨의 모습을 보았다. 살아있던 생명이 물질로 됐다. 유리막 앞에서 소리 없이 흐느끼는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갑작스레 눈물이 쏟아졌다. 나라는 인간은 원래 눈물이 마른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 눈물은 가지고 싶은 나의 인간이라는 증명이었는데  눈물이 났다.  갑자기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 이혼녀에서 미망이 된 그녀의 삶이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아마 처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여자친구의 손과 볼은 그렇게 어루만지고 예뻐하는데 엄마의 손을 잡기에는 너무 어색했다. 나는 끝내 엄마를 안아주지도 손도 잡지도 못 했다.      


장례가 끝나고 지금까지 나의 마음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벌판 위에 서있는 기분이다. 친한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도, 어설프게 술로써 달래기도 싫다. 이 마음 어떻게 달래주고 보듬어줘야 할까. 정작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 지금 이 순간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엄마가 누구보다 건강하고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아빠의 탓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 존재 그 자체로서의 15살이었던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해줬으면 좋겠다.      

엄마가
     미.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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