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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Apr 20. 202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zVY4lWfrbME


https://www.youtube.com/watch?v=3rYL6NaP0lw




출처: Numero Tokyo
출처: Numero Tokyo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영화를 관통하는 쿨재즈에 매료됐었고 영화와 함께 음악이 주는 치유와 새 출발의 메타포가 포함된 산뜻한 봄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서 운전하거나 산책할 때 자주 들었다.  이후 음악 감독 이시바시 에이코를 알게 되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끝으로 감독은 따뜻함과 희망이라는 정서 범주의 영화 속 정상 궤도에 완전히 안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영화는 아예 스타일을 바꿔버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암막이 끝나고 영화의 OST가 잔잔히 흘러나오면서 영어로 된 자막 'Evil does not exist' 이 나오는데 처음엔 Evil does exist이었다가 중간에 빨간색으로 된 not이 생기면서 제목과 주제가 강조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비로소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의미를 희미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암막이 끝남과  동시에 카메라는 울창한 숲과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누구의 시선인지 모르는 채, 약 5분간 움직인다. 이때 영화를 관통하는 비장미가 느껴지는 현의 울림이 관객을 제압한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주된 환영과 잔상은 영상보다는 음악이었다. 이후 두 번째 관람도 음악을 들으러 갔고 세 번째 재관람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영상과 인물 그리고 주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한 편의 미스터리한 문학 작품을 읽은 듯한 느낌. 자연과 인간, 도시와 쓰레기 그리고 죽음.


처음 내가 왜 영화보다 음악에 꽂혔는지는 나중에 찾아 본 인터뷰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시나리오 작업 후 음악이 덧붙여지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이 영화는 음악을 기준으로 스토리가 쓰였다.


처음 프로젝트는 이시바시 에이코가 해외 프로모터에게 영상 퍼포먼스를 제안받았고 이시바시는 하마구치에게 그 영상을 제작해달라고 영화 속 배경이 된 그녀의 스튜디오로 초대를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대화를 보면 마치 뒤라스와 고다르의 대화와 같다고 할까? 이시바시의 '토지의 기억'으로부터 출발 한 지역의 역사가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역시 천재들이 만나면 그 에너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 같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미 거장의 반열에 들어선 것 같고 이시바시 에이코는 류이치 사카모토, 히사이시 조, 유키구라모토를 뒤이어 차세대 영화 음악의 거장이 될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은 첫 번째 장면과 유사한 형태인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끝이 나며 제목의 의미를 한 번 더 곱씹게 된다.


자연은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없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인간이 자연에게 그 의미를 부여할 뿐. 인간은 그저 배경 속 지나가는 존재일 뿐.


교과서에서 아마 처음 배웠던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고 주장한 맹자 그리고 이와 상반된 주장을 펼친 순자의 성악설. 그리고 이에 인간은 원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자연적인 욕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살아가면서 인간 사회가 만든 가치 및 규범에 따라 바뀐다는 성무선악.


살면서 존재에 대한 고찰을 쓸데없이 많이 하면서 사는 것 같다. 광화문 광장 분수대에서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민들 그리고 연인들의 재잘거림까지.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오후 네시의 풍경 속 이 광경을 바라보면 100년 후면 이 광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나라는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그리고 사라질 것인지에 대해 황사와 미세먼지에 가려진 뿌연 태양처럼 찰나의 의문을 가진다.


나 자신 그리고 주변인들 더 나아가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성선이라든지 성악이라든지 와 같은 본연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그리고 가끔 희망을 품었다가 느끼는 절망. 절대 선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악으로 변하고 악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선인의 행동을 보고 놀랐음으로써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스스로 단언하고 지키려고 하지만 이 역시 쉽지는 않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한참 선거철인, 지금 각 정당은 자기들 스스로 선과 악의 이분법적 프레임을 걸어 상대당을 악마화 시키고 갈라치는 것을 우리는 매번 목도한다. 나는 이러한 것이 굉장히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획자인 아이히만 전범 재판 사건을 지켜보며 개념을 정리한 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읽어보면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에 대한 프레임을 쉽게 깨부술 수 있다.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씨의 인터뷰를 보면 손자들한테 아주 평범하고 용돈 잘 주는 자상한 할아버지라고  말한다.


선과 악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자연 속에서 인류가 함께 살려고 만들어 낸 유산인 도덕적 규범과 규칙을 적당히 지키며 살아갈 뿐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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