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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Apr 24. 2024

애정하는 것들과 프리지아 한 다발

https://www.youtube.com/watch?v=Ep_2F_BZJLY


1.

두 번의 봄이 와서야 비로소 시간 앞에 무릎 꿇을 수 있고, 기억이 추억으로 전환될 즈음, 광화문 광장에 있는 분수대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을 때 문뜩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애정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뭘까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싫어하는 것들을 먼저 줄줄이 쓸 수 있었지만 한 편으로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을 순 없었다. 분명 좋아하는 것들이 많았지만 막상 말하거나 쓰고자 하면 쓸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었다. 왜냐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아하는 것은 뭔가 거창하고 커야만 하는 관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어린아이가 크고 거대한 로봇이나 동물원의 코끼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작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써본다. 광화문 광장, 경복궁 안 아름드리 큰 나무, 아카시아 향,  광화문 광장의 벤치, 비온 후 흙냄새,  숲속 고즈넉한 한옥 툇마루에서 듣는 바람과 풍경소리, 아기 볼 냄새, 교보문고 특유의 유칼립투스와 편백나무가 섞인 향, 오후 여섯 시 성공회 성당에서 들리는 종소리, 정독도서관의 벤치와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빛,  MMCA 잔디밭, 오후 네시의 송현공원,  가벼운 반팔 티 위에 블레이저 입을 수 있는 적절한 온도와 습도의 날씨, 산미 가득한 예가체프,광화문  화목 순댓국, 서촌 채부동 돼지갈비 창가에서  햇살 맞이한 채 마시는 낮술,  서촌 영화루의 고추 짜장과 고량주, 성북동 옛날 짜장면 집의 탕수육, 종각 락더후와 제임슨 폭탄주, 을지로 닭무침, 연희동 월순철판 동태찜, 아차산 순두부집과 낮술, 광화문 씨네큐브와 에무시네마, 백석의 시,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 시리즈,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이시바시 에이코, 클래식, 재즈, 이소라, 김동률, 반려묘 물루 그리고 나를 응원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그들에게 주는 책 선물, 작년에서부터 좋아하게 된 꽃 사진.


2. 

얼마 전 고모들이 집으로 놀러 왔다.  앞서 하루 전, 남대문 시장에서 프리지아 한 다발과 와인 두 병 그리고 정독 도서관에서 장편 시나리오 세 부를 출력해서 고모들을 맞이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은 선물을 받는 것보다 그 준비과정에서 더 기분이 좋다는 것을 오랜만에 새삼 느껴본다.  요새 유행하는 오마카세, 호텔 식사 등의 선물도 좋지만 나는 값지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현재 할 수 있고, 잘할 수 있는 것은 나답다는 것인데 아름답다는 어원의 가설 중 하나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프리지아 한 다발, 백사실 계곡에서 마시는 화이트 와인 그리고 시나리오. 고모들을 호텔 숙소로 모시고 난 뒤, 집으로 가는 길, 무언가 마음속에서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하며 곰곰이 지켜봤는데 내가 동네 소개를 하면서 생각 없이 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동네는 쉬기엔 좋은 곳이야.  조선시대 때부터 별장으로 쓰였던 곳이고.. 그런데 난 이 동네가 그렇게 좋지는 않아. 왜냐하면 고독하거든. 맨날 보는 풍경이 인왕산 넘어 해가 지는 것을 보거든. 희망과 출발보다는 이별과 정리에 더 알맞은 곳 같아. 그래서 그런지 여기는 과부, 돌싱, 아픈 사람, 스님, 한때 유명했던 연예인, 정계 은퇴자 등 이상하게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 


둘째 고모는 몇 해전 사랑하는 남편을 암으로 여의었다. 나는 그 사실을 망각했고  뱉었던 말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저녁에 큰 고모한테 조심스레 문자를 보냈다. "고모 나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돌아온 답변은 "괜찮아.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했대. 오늘 정말 고마웠다. 너 덕분에 꽃도 20년 만에 처음 받아봤어. 다음에 또 보자" 


사랑하는 사람한테 줬던 프레지아 한 다발, 고모들에게 준 프레지아 한 다발의 느낌은 힘겹게 붙잡고 있던 기억에서 추억으로의 전환. 같은 꽃이지만 의미와 마음이 다르다. 꽃을 받고 좋아하는 그네들의 미소를 보니 할머니와 엄마가 생각이 났다.  이제서야 영원히 그리고 당연한 것 같은 가족 구성원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성별이 여자라는 것이 와닿기 시작했다.  더 소중하고 예쁜 말을 해야겠고 꽃과 같은 작은 선물들을 큰마음을 담아 자주 건네줘야겠다.


고모들을 보내고 집에 와보니 우리 집은 아직 겨울이다.  나한테도 봄 향기 가득한 프레지아 한 다발을 선물해야지.


3. 머릿속에서 올해의 여행을 그린다.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 남부에서 이탈리아 남부까지 이어지는 로드트립 혹은 북아프리카 알제리와 튀니지 여행을 하고 싶다. 카뮈가 말하는 타파사에서 신이 내려오는지 혹은 폐허가 된 오래된 로마 유적 그리고 숨 막힐 듯한 압생트 향기. 더불어 아랍식 커피와 빵. 금지된 곳에서 몰래 마시는 술. 걷고 또 걷고. 향유하고 사색하고. 미세먼지 필터링 없는 뜨거운 사막의 태양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있음을 또 살 수 있음을. 실현할 혹은 실현하지 못할 공상과 현실이 섞인 적당한 계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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