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의 반찬가게"는 내게 구세주였다.
요리할 시간은 없지만, 집밥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의 동아줄이었다.
애리의 반찬가게는 기업화된 반찬가게와는 달랐다.
음식이 살아있고, 맛있고, 심지어 건강했다.
그런 애리 씨가 반찬가게를 접고 "애리의 밥집, 술집"을 열었을 때,
나는 애리 씨의 가게를 찾아 집밥의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애리 씨가 17년에 걸친 음식장사를 접게 된 것은 코로나가 직격탄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코로나 때 다리를 다치게 되어서였다.
코시국에 다리까지 다치게 되니,
가족과 친구들은 할 만큼 했으니 그만하라고 입을 모아 조언했다.
17년 동안 하루 10시간 이상을 불판 앞에서 지낸 그녀의 손가락은 마디가 휘어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불판 앞에 섰던 것은 요리가 좋아서였다.
불판 앞에만 서면 명상을 하는 것처럼 순간에 몰입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더 좋았다.
그런 그의 첫 번째 직업은 수학 1타 강사였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성적이 좋아 수학과에 진학했지만,
대학에 가서야 본인이 좋아했던 것은 "학문으로서의 수학" 이 아니라
논리적인 설명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잘못된 선택을 어떻게 뒤집나 고민하던 차에
생계유지를 위해 시작했던 수학과외에서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그는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가르친 아이들의 성적이 고공행진을 했고,
입소문을 타게 된 그는 서초, 방배동 일대에서 일타강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과외를 접고 음식을 만들게 된 것은
돈 보다 가정을 선택하기로 하면서였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오면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과외가
우리 식구와 나의 삶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치열한 과외선생님의 일상을 접고 시작한 일이
친구들을 집에 불러 맛있는 요리를 해 먹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맛있는 요리가 집 밖으로 나와
애리의 부엌과 애리의 밥집, 술집이 되었다.
밥집, 술집을 접고 더 이상은 요리와 상관없이 살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건강하니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살기로 했다.
공부를 하려고 보니, 불어버린 몸이 버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먹고, 관리해야 하나 방법을 찾다가 유튜브 채널
다이어트 과학자 최겸을 만나게 되었다.
학구열이 풍부한 애리 씨는 길고, 어려운 영상과 책을 독파하며 따라 했다.
식습관을 바꾸고 12Kg가 빠지면서 건강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여행을 떠나던 날,
채널 운영자에게 비포, 애프터 사진을 전하며 말했다.
"당신 덕분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맘껏 사용하시라"라고
애리 씨의 증언 영상이 55만 뷰를 찍으며 채널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이제 애리 씨는 최겸 님과 함께 집밥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17년 동안 갈고, 닦아온 식재료에 대한 지식과 요리 경험에 일타강사로 쌓았던 언변이 더해지니 구독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나의 쓸모를 발견하게 된 애리 씨는 새롭게 다가온 일상의 기쁨에
설레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순간에 몰입하고
감사를 전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점이 모여 선이 되는 매직
애리 씨가 새롭게 열어가는 일의 세계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생겨날까. 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