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의 스타트업 라이프
딸은 중학교 3학년 2학기 무렵 동네 학교를 떠나 대안학교인 거꾸로캠퍼스에 다녔어요.
거캠은 프로젝트 기반의 학습을 합니다. 팀 단위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지식과 기술, 태도를 배웁니다. 딸은 거캠생활을 하는 동안 집을 떠나 주중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프로젝트 기반의 학습은 자발적 학습과 주도적 참여가 기본이라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자본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학교를 운영하다 보니 학생들이 맡아야 할 일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딸은 '너무나 할게 많은' 학교 환경에 나름대로 적응하며 기숙사에서는 친구들 밥도 챙겨 먹이며 생활해 왔습니다.
그러던 딸이 작년 10월, 학교를 떠나 본인이 하고 싶은 것들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미 본인 스스로 마음의 결정을 마친 상태라 엄빠와의 협의 없이 통보하는 딸에게 약간의 배신(서운함) 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런 딸의 결정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거꾸로캠퍼스의 존재를 알려준 건 저였지만, 거꾸로캠퍼스의 입학설명회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찾아간 건 딸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딸이 exit 결정을 했다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엄빠는 미성년 딸의 미래가 걱정되고 궁금하니까 물었습니다.
학교 그만두고 하고 싶은 게 뭐야?
구체적이진 않지만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뭐든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딸은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쿠키, 케이크를 거쳐 다양한 수공예품을 만들었죠.(고객의 의뢰를 받아 만들어 판 적도 있어요) 애니메이션으로 배운 일본어는 혼자 일본 여행을 가고,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로 구사하게 되었고요. 요즘엔 중국 드라마, 음악에 빠져 중국어 흘려듣기에 한창입니다.
엄빠는 정해진 직업을 목표로 하는 게 구닥다리가 된 시대이니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걸 다행으로 알고 아이의 결정을 존중해 주기로 했습니다. 1~2년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고 해서 큰 일 나지도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꼭 학교에서 배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17세에 학교를 엑싯한 따님은
-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한다
- 내년 초에 검정고시를 치른다
- 대학 진학은 천천히 결정한다
정도의 가이드를 정한 후 모범생 대신 모험생의 일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엑싯한 따님이 맘껏 시간을 투자한 대상은 덕질이었습니다.
그리고, 덕질의 대상이 일본 애니에서 남자 아이돌(이라고 하기엔 연식이 있는^^:;)로 바뀌었습니다.
따님이 선택한 덕질의 대상은 유키스의 수현인데, “참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서 좋다고 합니다.
따님은 유키스의 일본 활동 영상에 한글 번역 자막을 붙이고 편집해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덕질이 동기가 되다 보니 일본어, 영상편집, 글쓰기를 힘든 줄 모르고 무한 반복합니다.
딸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교과서, 선생님, 시험이라는 요소로 짜인 공교육 시스템은 창조적인 삶을 원하는 아이들에겐 창의성을 속박하는 굴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울 따님의 학교 exit과 덕질 라이프를 접하게 된 지인이 울 따님을 만나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본인이 다니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서비스가 울 따님 같은 고객을 타깃으로 하는데 유저 테스트 차원에서 물어볼 것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따님은 세상 구경 차원에서 모바일 팬미팅 서비스 헬로 라이브 사무실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저 엄마 지인이 밥 사준다고 해서 회사에 놀러 갔을 뿐인데,
울 따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생생한 덕후 라이프를 접하게 된 헬로 라이브팀은 서비스 운영과 마케팅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건넸습니다. 그리하여 따님은 헬로 라이브의 글로벌 채널 관리와 이벤트 페이지 작성, 영상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본캐는 학생이니 회사인 부캐는 일주일에 한 번 출근에 하루 4시간 미만 원격근무 정도로 제한하고 있어요.
따님은 일을 통해 본인이 소비자로 접하던 세상을 생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소속사가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다고 불평하던 소비자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팬들이 덕심을 맘껏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서비스를 만들어 갑니다. 그동안 엄빠가 건네는 용돈에만 의존해 살아가던 딸아이는 회사에서 받는 월급이 생기게 되니 '10대의 재테크'라는 꼭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무작정 통장에 넣어놓기만 하는 게 아까워 어떻게 할까 나름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역시 본인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학습하겠죠?
딸은 오는 4월 검정고시를 치를 예정입니다. 6월 말에는 11개월 일정으로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날 예정이고요. 어학연수는 '영어' 보다는 '경험'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사람들, 문화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직접 보고 느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학력고사 준비에만 목매달며 그 시절을 살았던 저로서도 울 따님이 몹시 부럽네요 ㅠㅠ) 일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불어 등 다양한 언어에 관심이 있으니 사람을 통해 다양한 언어의 세계에 빠져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학 진학은? 뭔가 해보고 싶은 공부나 필요성을 만나게 되면 그때 결정하고, 준비해 볼 계획입니다. 지금 뭔가를 정하기엔 1년 뒤의 세상은 또 엄청나게 변할 테니까요.
울 따님의 다소 다른 선택이 누군가에게 힌트 혹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따금 적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