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Era of COVID19
역사적으로 국가들은 급증하는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 가족계획(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하거나, 현대에 들어서서는 저출산과 고령화 극복을 위해 출산 장려책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 멀찍이 나아가, 사회를 이루는 '구성세포'로써 개인을 규정하고, 국가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 국가가 인간을 독점 생산하는 정책이 입안된다면 어떨까? 이러한 멋진(Brave New) 아이디어가 유통되고, 지배자들에 의해 정책화되는 신세계. 인류가 어떤 역사를 반복하면 이런 세계가 도래하게 될까?
올더스 헉슬리(1894∼1963)는 누구도 쉬 상상 못 할 그 세계를 치밀하고 신랄한 필체로 그려낸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작가의 집요한 정신세계에 매료되었고, 파격적이다 못해 파괴적인 작가의 상상력에 정신이 잠시 혼미하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의 <멋진 신세계(원제 Brave New World, 1932)>
포스트 코비드 19의 세계는 결코 그 이전과 같이 않을 거라는 많은 이들의 예견에 나도 동의한다. 재난의 성격은 다르지만, 2014년 4월 16일 전후의 차이를 내 사고와 삶에서 묵직하게 경험해온 나에게 이 예측은 크게 설득력 있다. 이 세계화된 전염병이 단 한 국가에도 예외 없이 몰고 온 파장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그 자체로 상당한 충격이다. 자연재해가 되었든, 인재이든, 복합적인 재난이든, 그게 장기화될(protracted) 때, 초기에 받은 충격은 점차 무뎌지기도 하고, 일상이 된다. 뉴 노멀. 우리가 통상 '뉴'라는 단어에서 기대하는 긍정의 기운이 포스트 코비드 19를 떠올릴 때는 영 감돌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의 '멋진'이 경멸조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이 '멋진' 신세계(포드 기원 632, 서기 2540년)는 각각 알파, 베타, 델타, 감마, 엡실론 등으로 계층을 구분하여 인구를 대량 출산(디캔팅) 한다. 각 계급별 상이한 파블로프의 반사가 나타나도록 실험관을 세팅하여 계급 사회화된 인간들을 대량 양육한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이며, 계급화된 개인들은 국가가 투자하고 기대하는 반사 행동을 보여주므로 계급 간 충돌이 없다. 개인과 개인은 서로를 성적으로 도구화할 따름이며, 이에 대한 윤리적 거부감은 없다. 문학이 부재하므로, 종교도 신도 없으며, 사랑도 없고 고독도 없고 고통도 없다. 유...토피아?
"가족과 같이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해봐요"
그들은 상상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소설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경제학자 맬서스(1766~1834)의 인구론에 그 이념을 두고 있으며, 멋진 신세계는 사실 맬서스 공화국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맬서스 블루스. 맬서스 훈련. 맬서스 허리띠. 플러스 알파에서 마이너스 델타까지의 이 개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포드(각하) 보다는 맬서스이다. 7명 분의 식량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10명 중 3명이 제거되어야, 최소 7명의 생존이 보장되므로 '3명'이 탄생되지 않도록 국가가 나서서 억제하는 것. 생식보건(Reproductive health)의 전권을 국가가 쥐고 있어야 이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을 맬서스 화하는 것은 포드 체제의 최우선 국정 과제이다. 바로 앞서 기술한 부재된 것들은 거창한 국가 이념에 기인하지 않고, 오직 이 억제를 이어가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소설에서는 일종의 향정신성의약품인 '소마'가 등장한다. 소마는 개인의 감정과 행동을 지속적으로 조절하게 하며, 이를 통해 개인이 행복을 영위하도록 한다. 그렇다고 소마가 쾌락 중추만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인내심과 지구력, 도덕성까지 제공하는 소마는 정제된 종교(refined religion), 종교에 내재된 일부 성질들의 화신(embodiment)이라 할 수 있다.
병 속에다 당신의 도덕성 가운데 최소한 반을 넣어가지고
어디든지 다닐 수 있습니다.
눈물이 없는 기독교 - 그것이 바로 '소마'입니다.
멋진 신세계에는 개화(맬서스화 혹은 대량 출산)된 사람들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개화된 사람들과 야만인들(전통적인 방식으로 탄생한 이들. 소설 속 말파이스 사람들), 그리고 타락한 개화인 사이에는 구역을 나뉘어 있어, 구분된 삶을 산다. 개화된 이들에게 야만인(Savages)들은 마치, 부시맨(The Gods must be crazy, 1980)이라는 영화에서 백인들의 시선으로 제멋대로 그려진 원주민들 같다. 이들에게 모든 야만인과 원주민들은 계몽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소설의 분위기는 세계 국장(토마킨)이 '반사회적'으로 낳은 아들(존)과 그의 어머니(린다)가 보존구역에 살다가 런던에 등장하면서 점점 고조된다. 이때부터 개화인과 야만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시작되는데, 마치 내가 야만인 존이 되어 신세계를 유랑하는 기분이 든다.
또 하나, 신세계가 추구하는 것은 연대와 희생이다. 대의와 다수를 위한 희생. 오직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부분. 연대(solidarity)가 이렇게 맥락에 따라 오염되고 오용될 수 있는 개념인지를 새삼 느낀다.
오시오, 더욱 위대한 그대여, 사회적 친구여,
열둘을 없애 하나로 만들어주소서!
우리는 죽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더 큰 인생이 시작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체제에 의해 강제된 연대(흠. 이걸 연대라고 이름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는 이는 개인성의 말살을 전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개인성이라는 것은 탄생 전부터 이미 표준화와 계급화 공정을 통해 거세된다.
헌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지난한 역사도 전쟁에 의해, 정치적 폭압에 의해, 혹은 자연재해 등 불가항력적 사건에 의해 개인성이 말살된 채 생존해야 했던 기억이 있다. 소설 속 세계가 마냥 저세상 이야기만은 아니라는데 생각이 닿자, 이 인류 역사에 대한 불안감이 또 스멀스멀 올라온다. 무섭. 글을 맺을 때가 된 듯.
9년 전쟁, 경제 대붕괴.
세계 통제냐, 아니면 세계 파괴냐 사이에 양자택일이 있었습니다.
포스트 코비드 19를 살아가게 될 우리들. 도사리는 위협은 비단 전염병에만 있지 않다. 기후 변화로 인한 숱한 재난 시나리오. 이미 우리 삶 곳곳에 뿌리내려 있는 환경 문제. 이 상황에서도 가속화되었던 자본주의적이고 국경 없는 대량 생산과 소비. 소비를 부추기는 산업들의 비정형적 발전. 또 전염병. 팬데믹. 아직 전 세계 곳곳에 끊이지 않는 전쟁. 학살. 이 모든 것 위에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정부.
코비드 19와 같이 압축적이고 전지구적으로 동기화(synchronised)된 재난이 몇 차례 더 발생한다면, '세계 통제'냐 '세계 파괴'냐라는 말도 안 되게 '멋진' 선택지가 어느새 우리 앞에 짠~ 나타나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덧. 이 책 역시 쓰고 싶은 관전 포인트가 너무 많은 것이 탈이다. 뭐 말이 탈이지 이걸 탈이라 하기엔, 세상이 지금 너무 크게 탈 난 상태... 암튼 그 포인트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니, 쓰는 나도 자못 지루해져서 선택적으로 몇 가지만 남겨 보았다. 다른 포인트로 감상한 다른 사유들은 이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음.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잔혹 동화와도 같은 신세계의 잔인성에 맞서는 무기로 헉슬리는 셰익스피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부터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대사를 패러디한 것이니. 이 부분에 대한 고찰을 좀 더 해보고 싶다. 또 특히 다음에는 헉슬리의 '연애 대위법'이랑 후기 작품들을 더 읽어본 후에 작가에 대한 관찰을 써볼까 싶기도 하다.
아... 덧 2. 달리 초이스가 없어서 동서문화사 '멋진 신세계'로 두 번째 읽었지만, 고생하셨을텐데 죄송하지만 번역이 영꽝이다.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