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Mirrored
앞서 멋진 신세계의 감상을 정리하고 보니 디스토피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1984(1949)가 다시 궁금해졌다. 이미 과거지사가 된 오웰의 공상이 오늘에게 던지는 통찰이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특히 조지 오웰(본명 Eric Arthur Blair)이라는 작가와 1984를 좀 더 비판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싶은 생각도 들던 터였다.
그러자니, 1984와 이제는 내 머릿속에 거의 사라져 가는 동물농장(1945)에 대한 기억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해서 오웰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1946)도 다시 펼쳐 보았고, 특히 그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과 카탈루냐 찬가(1938)는 바로 구매. 그러다 보니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1933)과 버마 시절(1934)도 일단 장바구니에 스윽. 잠시 고민은 했으나, 몇몇 작품은 원문 비교를 위해 원서도 내려받기하고, 카탈루냐 찬가와 같은 배경을 담은 켄 로치 감독의 토지와 자유(1995)까지 찾아서 감상해 보았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여기저기 오지게도 질러놓은 것이다. 허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아주 잠시 갓길 정차
1984의 디스토피아에 등장하는 위 슬로건을 다시 보자마자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ki, 1920~1994)의 시 The Genius of the Crowd가 떠오른다. 뒤이어 내가 애정 하는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잠시 스쳤다. 이 둘도 조만간 다시 꺼내 보는 것으로.
1984 보다 조지 오웰
1984와 동물농장, 나는 왜 쓰는가 정도로 내가 이해해온 그의 창작 모티프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와 파시즘의 대척점에서 비롯된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은, 그의 결벽주의적인 자기 객관화, 고도의 도덕성, 치열한 반성과 자아 해체, 신랄한 비판 의식, 시니컬한 위트, 진정성 있는 연민과 실천, 뜨거운 열정에 비해 안타깝게도 짧게 마감된 생에 대해서이다.
그가 기록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완벽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겠으나), 또 그 자신이 스스로의 기억을 왜곡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쓴 것을 감안하여, 오웰은 내가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성질의 거의 모든 면면을 가진 사람이자, 그 위에 날카로운 사회 고발 의식과 정치적 관점을 소설로 승화할 수 있는, 내가 가장 부러워마지않는 천성과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 다만, 평등한 사회로서의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그의 정치적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정치적 제언들은 다소 나이브하게 느껴진 게 사실이고, 멋진 신세계에 대한 그의 비평은 그의 고지식한 상상력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다.
오웰의 전작들을 보면 일찍이 디스토피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서적들을 탐독했음을 알 수 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언급된 디스토피아/유토피아 소설들은 H.G. 웰스의 Men Like Gods, The Dreams, The Sleeper Awakes, 잭 런던의 The Iron Heel, 올더스 헉슬리의 The Brave New World, 새뮤엘 버틀러의 Erewhon 등 다수이다. 추측컨데, 전전/후와 전시 상황이 다수 문학인들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웰 자신도 이런 서적들을 비판하고 수용하면서 본인만의 신세계를 건설했을 것이다. 오웰 세계의 특징은 감시, 언어 통제, 기록 조작, 이 세 가지로 추려서 일단 정리해본다.
1. 그렇다고 한다.
빅 브라더의 눈은 동전, 우표, 책 표지, 깃발, 포스터, 담뱃갑 등 그 어디에나 있었다. 늘 그 눈이 감시를 하고, 그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국가는 시민을 감시한다. 감시의 눈은 어디에나 있으며, 빅 브라더의 사상경찰(Thought poice)들은 반체제인사, 즉 사상범을 감시하고 색출하여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Thought Police라는 용어가 이 소설에서 첫 등장하였고, 서구 사회에서 많은 경우 이 개념을 오웰의 언어로 소개해 온 것은 사실이나, 이 자체가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Thought Police가 본을 딴 정치 경찰(Secret police)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조직된 체카(Cheka)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는 이후, 다른 '사회주의' 국가 체제의 공권력으로 복제되어 왔으며, 다른 이름, 다른 형태로 오늘날까지 여러 '사회주의' 및 전체주의(totalitarian) 국가들에서 그 맥을 이어왔다.
여기서 오웰의 환언(paraphrase)이 주는 의미는 그 개념의 독창성(originality)에 있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연시되는 정치 경찰의 개념을 자유민주주의(혹, 자본주의) 국가에 치환하여 문제 제기를 한 데에 있다. 실제로 오웰은 유럽내 확산되는 파시즘과의 싸움을 그의 소명으로 삼았으며, 1984는 어찌 보면 이 싸움이 참패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담아 동시대인들에게 던진 경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의 잔인성은 국가의 적과 외국인을 비롯하여 반역자, 파업자, 사상범에게 향하고 있었다. 서른 살 이상의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거의 보편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공권력에 의한 감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1984에는 각 개인들이 서로를 감시하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 그것은 타인 대 타인을 넘어서 가족 안으로 파고 들어와, '잘 때든 깨어 있을 때든, 집안에서든, 침대에 누워 있을 때든' 누구나 누구에게나 감시에 노출되어 있다. 다만, '노동자와 동물은 자유롭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오웰의, 결코 위선적이지 않은 관심과 애정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아주 상세히 담겨 있다. 그 애정과 신뢰, 그리고 당대 영국 내 계급에 대한 문제제기가 1984에 얼마큼 투영되어있는지도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1984에서 그는 계급이 상층, 중층, 하층으로 나뉜다면, 오직 하층 계급(무산 계급)의 목표만이 '모든 차별의 폐지와 인간 모두가 평등한 사회의 건설일 것'으로 못 박는다.
2. 언어로 정치를 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국가가 사상의 자유를 제한한 예는 끊임없이 있어왔고, 오늘날에도 각 국에서 다양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사상은 주로 집권당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정치 형태를 불문하고 집권(당), 권력(욕), 계층(주류와 비주류), 이익 집단 등이 사회 내에 존재하는 한, 지배 계층의 사상 통제는 직설적이거나 교묘한 방식으로 생존한다. 가깝게는 우리나라도 박근혜 정권 때, '블랙리스트'라는 형태로 집권 보수당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통제가 있었고, 그 외에도 '댓글 알바'와 '기사 조작'을 통해 인식과 사고를 제한하려는 시도들도 이어져 왔다.
한 나라의 공식어를 집권당(Ingsoc)의 본성(nature)과 동일시하여 시민의 사고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 이것이 오웰식 디스토피아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정치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여 시민들의 사고를 통제하려 한 예는 역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오웰은 여기에서 할 걸음 더 나아가 국가가 언어를 반복적으로 재창제하여 시민들의 의식에서 무의식까지 통제하는 사회를 그렸다.
신어(Newspeak)의 최종 목표는 사고의 폭을 좁히는 거야. 알아? 그렇게 하면 결국 사상범은 없어질 거야.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가 모두 없어지니까.
(중략)
신어는 영사(Ingsoc)고, 영사는 곧 신어야
언어를 개념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면 풍부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개념들, 개념과 개념 간 고리, 즉 어휘들을 제거함으로써, 사고를 좁히고 나아가 무력화하는 것이 빅브라더 정권의 최대 국정 과제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감시 조차 필요 없이 스스로 사고하지 않음으로써, 사상 범죄의 싹이 제거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한 번 더 떠올려본다. 우리가 '악'을 '악'으로 인지할 때, 이는 이미 평범함을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악'으로 인지하지 못할 만큼 그것이 내재화되어 있거나 다중에게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평균적인 것이므로 ‘평범'하다 할 수 있다. 아렌트가 말한 평범한 악은 사유하지 않는 악이다. 나치즘의 '악행'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같은 각 개인들이 사고하지 않음으로써 초래된 집합적인 결과라는 것. 그 사고의 말살을 '언어 통제'를 통해서 실현하고자 한 것이 오웰이 그린 디스토피아라 할 수 있다.
3. 조작은 기본?
디스토피아 영상물로 유명한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의 당신의 모든 순간(The Entire History of You)을 보면, 사람들은 그레인이라는 칩을 인체에 삽입해 개인의 매 순간을 저장한다. 그레인이 장착된 모든 이들은 그 기억을 저장 후 재생할 수 있고, 사후 조작도 가능하다. 조작된 기억은 고스란히 개인의 과거로 남겨진다.
이런 사회를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나는 만연한 범죄, 편의주의적 사고방식의 확장, 기술 관료제(테크노크라시) 사회로의 진화 정도를 추측해 보았다. 국가가 개인에게 저장된 매 순간(최초 버전)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범죄도 이 기록 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범죄 예방과 사건 처리를 단순히 '기술적'이고 '전체주의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했을 때, 그레인은 어느 사회에서도 보편화될 수 있다.
블랙 미러만큼 고도로 기술적인 디스토피아까지는 아니지만, 오웰도 기록의 은폐 등 조작을 통해 팩트와 기억을 바꾸는 사회를 꿈(이 경우, 악몽) 꾼다. 기록을 조작하여 재구성된 과거는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쓰인다. 개인이 실제 사건과 정황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한 사회라면, 기록된 자료로만 정보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 기록 조작과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당의 '기록국'에서 이뤄진다. 당에 유익이 되지 않는 모든 기록들은 날조되거나, '비밀 소각장'에 버려져 아무도 명증 할 수 없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우연찮은 기회에 기존에 인지한 것과 상이한 팩트에 접근하게 되면 개인은 인지 부조화(다른 말로 매우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보통 이는 자기 합리화나 확증 편향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이중사고'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말인즉슨, 본인에게 '인지'된 부분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것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 슬로건에서 볼 수 있는 각 한 쌍의 대립된 어휘는 이중사고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 이중사고는 나중에 기억의 조작, 교묘하다 못해 교활한 감시와 더불어 주인공 윈스턴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주인공을 디스토피아의 전형(혹은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마지막으로,
상술한 세 가지 이외에도, 우리 시대에 교훈점으로 인용할 만한 빅 브라더 사회의 특징들은 적지 않다. 1984에 묘사된 각 요소들을 따로 놓고 봤을 때, 현재 사회의 모 이슈를 부각하여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해 갖다 쓸만한 내용들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와는 달리 1984는 오웰 당시의 정치/사회적 고민과 과제를 뚝 떼어놓고, 무작정 '오늘날 이 부분은 이러이러하게 적용해야 한다.' 정도로 말하는 것은 책에 대한 몰이해까지는 아니어도 덜 이해 정도로는 보인다. 시제를 과거, 현재, (현재와 미래 사이의) 과도기, 미래로 놓고 봤을 때,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과도기에 집중했다면, 1984는 오히려 과거와 현재에 무게를 실었다. 그만큼 1984는 오웰의 초기작, 전작들을 통해 그의 사회(특히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과 정치사상을 이해한 만큼, 더 속 깊은 이해가 가능한 작품인 것 같다.
덧. 오웰 심층 탐구를 위해 오지게 지른 책과 영화에 대한 감상문은 따로 작성해서 본전(?) 뽑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