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겨울 자축하는 자리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축하 자리는 아니었다. 조용하고 단순하게 내 마음 하나 고쳐먹고 '돈을 버는 일을 그만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깊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낙서로 시작된 메모지가 어느새 꽉 차 있었다. 매달 지출되는 생활비 목록, 앞으로 돌아올 전세입자들 만기일이 있었다. 최근에 복잡하고 난해한 부동산 세법이 개정되면서 전세금도 5% 상한제가 생겼으니 5%에 대한 내용을 적어놓았다. 나열된 숫자들을 한참 보았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꿀꺽~삼키듯 먹어 버렸다. "너무너무 일하기 시르다. 싫은 건 그만하자!!!" 19살,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근로자로 시작했었고 쉼 없이 생활비를 버느라 전전긍긍하며 돈 버는 기계로 살아온 지 26년 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집에 있다가 세탁기를 돌리고 거실에 나와서 빨래를 널었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12월의 선물은 눈 내리는 것으로도 충분하구나' 싶게 눈송이가 크고 풍성해서 마음까지 달큼해지는 듯했다.
주차장에는 눈이 쌓이고 있어서 머릿속에 걱정이 잠시 스쳤다. 파주 금촌에 살 때는 그나마 지하 주차장이 있어서 차에 말썽은 없었는데 파주 법원리는 달랐다. 내 몸은 파주 법원리의 추위를 내복, 온수 매트, 보일러로 견뎌냈지만 내 차는 법원리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벌써 몇 차례 서비스를 불렀고 끝내 배터리 교체까지 했다. 차 배터리가 또 말썽일까 봐 걱정이 돼도 지금 당장 차를 움직일 것이 아니기에 시동확인하는 게 무의미한 일이라 마음을 내려놓았다. 내일 외출할 때 시동이 안 걸리면 그제야 서비스를 부르던지, 점검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빨래를 널며 창밖 내리는 눈을 보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까지 눈길이 내달렸다.
비처럼 꽃잎처럼 풍성하고 아련하게 흩날리는 눈꽃 송이에 홀려 '집에만 있기는 손해다' 싶은 생각이 들자 집 앞 커피숍이 떠올랐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로션만 바르고 옷은 단단히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길이 미끄러워서 종종걸음으로 발을 옮겨야 했다. 다소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동네가 하얗게, 뽀얗게 덮혀져 엽서 속에 나오는 풍경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집에서 10분 이상 걸어가면 마트가 있었다. 마트 가는 길에 개인이 운용하는 작은 커피숍이 있다.ㅡ 부천토박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파주 금촌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금촌에서 6개월 살다가 다시 파주 법원리로 이사 와서 집과 집 근처 마트만 갔다. ㅡ 그저 집을 오고 가며 눈으로만 봤던 카페였다. 카페 안에 들어서니 남자 사장님 한 분이 계셨다. 사장님은 모자를 쓰고 계셨다. 그 모습은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 같았다. 사장님이 왠지 모르게 센티해 보여서 시골마을 카페장답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는 창이 넓어 밖이 훤하게 보였다. 차창밖에는 좀 전보다 다소 굵어진 눈송이가 조용하지만 화려하게 내리고 있었다. 카페 안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작은 카페를 온통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아 아늑함이 느껴졌다. 자리를 먼저 잡고 앉으며 가지고 온 책을 책상 위에 놓고 주인장을 향해 갔다. 평소 제일 좋아하는 ㅡ 고소하고 커피 향이 진하면서 우유의 부드러움이 잘 조화를 이뤄 입에서는 쌉쌀하며 향기롭고 ㅡ 목 넘김이 부드러운 카페라테 한 잔과 조각 케이크를 시켰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먹고 달달한 케이크가 입안에 들어갔다. 입속에서 달콤 쌉싸름이 조화를 이뤘다. 커피숍까지 걸어오면서 얼었던 몸이 녹으며 말랑해지고 몰캉한 기분에 취하는 것 같았다. 커피 향이 코를 자극하고 새콤달콤한 케이크가 호르몬을 기분 좋게 활성화시켰다. 창밖에 내리는 눈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충만하게 채워주는 듯했다. 카페 안은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차 있어 몸을 녹여 주었다. 12월답게 크리스마스 캐럴이 조용하게 또는 신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와 가슴이 온통 빨갛게 초록으로 형형색색 불을 켜며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다.
자리에 앉아 가져온 책을 펼쳐 몇 장 읽었다. 그러다 메모지를 꺼내서 낙서를 시작했다. 의미 없는 낙서를 하다가 생활비 내역을 적고 앞으로의 일정이나 계획을 적어 내려갔다. 그러다 보니 자금계획을 적은 메모가 된 것이다. 지나온 여러 가지 역경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람을 만나는 게 싫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무게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성인이 된 후 매달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무게감에 조바심을 내면서 살았다. 한 달이라도 쉬면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서 일을 그만둔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메모지를 보면서 웬걸~ 그만둬도 될 것 같았다. 조용하고 급작스러운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스스로 하는 다짐일 뿐이었다. 그날로 나는 파이어족이 되었다.
12월, 선물처럼 꽃잎처럼 흩날리는 눈을 보면서 눈 결정처럼 천차만별의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