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이 됐다. 새벽에 일어나서 부업을 하며 공부를 했다. 아침이 되면 큰언니네 집으로 출근했다. 큰언니네 집에서 부업을 하는 게 편했다. 집에는 일을 많이 가지고 갈 수 없었다. 몸이 날로 무거워져서 빈 몸으로 걸어 다니는 것도 힘이 들었다. '한도시다'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다리가 시큰거리고 욱신거리는데 그게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통증이 심해서 걷는 게 쉽지 않았다. 만삭의 몸은 걷는 것도, 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상상력이 많은 나는 걷다가도 재밌는 상상을 하곤 했다.
6월 4일 아침에 작은언니가 나를 불렀다. 맛있는 걸 사준다고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돈 때문에 궁상떠는 동생을 위해 작은언니가 종종 맛있는 걸 사주었다. 가끔 소고기도 사주고 먹고 싶은 걸 물어봐 주었다. 그날은 작은언니 첫아이의 생일날이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사줘서 배가 부르게 먹었다. 6월이 돼서는 부업을 많이 하기 힘들었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오래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목표했던 돈을 다 모아놔서 일에 쫓기는 마음도 줄어들었다. 그날은 쉬려고 시간을 빼놨고 작은언니와 같이 맛여행을 하며 놀러 다녔다.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었다.
임신한 후 만삭 때까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속에서 탈이 났다. 오후에 집에 들어왔는데 영락없이 속이 불편했다. 소화가 안된 건지 가슴이 아프다가 메스꺼워지더니 결국 토를 했다. 보통 속이 불편하면 영락없이 토가 나왔다. 심하게 많이 하는 날도 있었지만 불편함을 덜어낼 만큼만 조금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계속 토를 했다. 빈속을 만들어 내려고 하려는 듯 토가 끊이지 않았다. 심하게 체한 건지 토를 했는데도 가슴은 쿡쿡거리고 머리는 어찔하고 불편했다. 연신 토를 하면서 기운이 없어졌다. 그는 새벽 출근이라서 오후에 퇴근해서 밥을 먹고 자고 있었다.
오후 3시쯤이 되자 그때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부터 왠지 산통이 시작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통증이 계속 심해졌다.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통증에 정확한 간격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산통이 맞았다. 여러 차례 산통에 대한 교육을 받았었다. 첫 분만인 경우 산통 간격이 5분 이내가 되면 병원에 와야 한다고 했다. 너무 빨리 가면 병원에 오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통증 간격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10분 내로 산통 간격이 좁아지자 이전 통증과 다른 아찔한 통증이 느껴졌다. 오늘 아이를 낳는 건지 다음날 낳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섣불리 그를 깨울 수가 없었다.
산통 간격이 좁아지면서 서서히 병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산통은 신기하게도 간격 때마다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분만을 하려면 병원에 가져갈 준비물들을 챙겨야 했다. 미리 메모해 놨던 것을 체크해 가면서 물품을 가방에 넣었다. 산통이 심해질 때는 온몸에 통증이 있고 식은땀이 나기를 반복했다. 생리통에 몇 배가 되는 통증이 배를 죄어오는 듯했다. 혹시라도 너무 일찍 그를 깨워서 그가 일을 못 가게 될까 봐 최대한 소리가 안 나게 조심하며 움직였다. 통증이 또 시작됐다. 시간을 체크하며 5분이 될 때까지 입을 틀어막고 참았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수건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병원에서 체크해 준 시간만큼 통증 간격 시간이 짧아졌다. 그를 깨웠다. "통증 간격으로 봐서 산통 같아요. 병원에 데려다줘요." 흔들어 그를 깨웠다. 한참 잠을 자야 하는 그를 깨우기가 미안했지만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일어났다. 준비한 물품을 가리키고 가방을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회사 탑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가서 산통 시간 간격을 말했더니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방안에는 이불 한 채가 놓여있었고 침대가 아닌 온돌바닥이었다. 그때부터 더 심한 산통이 시작됐다. 병원에 도착하니 통증이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병원에 가면서 그에게 반드시 아이를 낳은 다음에 엄마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엄마의 자녀들 중 아무도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지 않았다. 모두 다 제왕절개로 수술해서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나는 형편상 자연분만을 해야 했다. 산통은 내가 참는 건데 지켜보는 엄마가 수술을 해달라고 할까 봐 겁이 났다. 진통을 경험하면서 기운이 너무 없다는 게 느껴졌다. 힘을 줘야 하는데 온몸에 힘이 없었다.
진통이 잠시 멈췄을 때 그에게 부탁했다. 바나나우유를 하나 사다 달라고 말했다. 기운이 없어서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진통 중에 바나나우유를 먹었다. 통증 간격이 짧아지자 방에서 침대가 있는 분말실로 옮겨졌다. 산통 시간이 1분 간격이 되자 간호사와 의사가 힘을 주라고 재촉했다. 할 수 있는 만큼 힘을 주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소리를 질렀다. "힘줘요, 엄마"라고 연신 나에게 말했다. 그러다 아이가 큰일 난다며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거의 울다시피 하다가 간호사에게 "어떻게 힘을 주라는 거예요?"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아랫배에 힘을 주라고 말했다. 나는 나대로 하라는 대로 하는 것 같은데 간호사의 급박한 목소리로 내가 뭔가 제대로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간호사는 그러다 아이가 위험해진다는 말을 몇 번이고 계속했다. 나는 죽는 힘을 다해 다시 힘을 냈다. 온몸이 아픈데 어디에 힘을 주는지도 모르겠고 정신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게 됐다. 신음 소리와 통증을 참는 소리가 병원 밖까지 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진통은 쉽게 끝나지 않고 계속됐다. 기진맥진하다가 다시 힘을 주기를 반복했다. 간호사선생님의 재촉하는 소리가 더 커졌다. 정신은 없고 기운도 없고 그대로 쉬고 싶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이미 너무 힘이 들었다. 간호사와 의사가 호통을 치면 다시 힘을 주었다. 새벽 4시쯤 됐을 때 고통 속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드디어 통증이 일순간 멈췄다. 뭔가 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샘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아기 건강해요?"라고 물어봤다. "네, 건강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없는 와중에 나는 아기의 손가락과 발가락 개수를 세고 있었다. 간호사님이 "건강한 아들입니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아기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기의 얼굴이 쪼글거리고 주름이 많았다. 얼굴은 빨갛고 지저분해 보였다. 내가 봤던 아기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못생겼네요."라는 말이 나왔다. ㅎㅎㅎ
조카들을 볼 때는 그렇게 쪼글 한 모습이 아니었는데 아기를 낳자마자 보니까 아기의 얼굴에 주름이 많았다. 그건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서 고생을 많이 해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갓 태어난 아기를 처음 봐서 그걸 몰랐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 아들인지 딸인지 묻지 않았기 때문에 아기가 태어나서야 아들인 걸 알았다. 손가락 발가락 10개씩 있는 건강한 아기를 낳았다는 감격스러움에 마음이 벅차왔다. 간호사는 나에게 걸어서 다른 방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병실을 나와서 산모가 쉬는 방으로 걸어 나왔다.
방을 옮길 때 보니 그가 문밖에 있었다. 그를 향해 손가락을 구부리면서 <브이 자>를 들어 올렸다. 그가 울고 있었다. "바나나우유 덕분에 순산할 수 있었어요"라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에게 엄마에게 순산했다고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아침이 돼서 엄마가 병원으로 찾아오셨다. 엄마는 자연분만을 어떻게 했냐며 눈물을 보이셨다. 자신은 자식들을 모두 자연분만으로 출산했으면서 자식들이 산고를 겪는 건 차마 못 보셨었다. 그래서 큰언니, 작은언니, 새언니마저도 모두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으라고 말했었다. 자녀들 중에는 나만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출산했다.
후문인데 우리 형제자매들의 모든 조카들은 얼굴이 작고 두상도 작은 편이다. 나의 아들만 유일하게 두상이 엄청 크다. 조카들보다 한참 어린 갓난아이일 때부터 우리 아들은 머리가 컸다. 두상이 가장 큰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낳았다고 오랫동안 가족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산모의 고생은 고생도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퇴원하고 아기를 씻기면서 아기의 몸을 보며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기 몸에 온통 멍이 들어있었다. 세상에 나오느라 나보다도 더 힘들었을 아기를 씻기면서 아기에게 감사 인사를 연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