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작은언니의 남편은 당시 F 식품 탑차 운전을 하고 있었다. 식자재를 마트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나는 부천으로 이사해서 집을 새로 얻어 아이 아빠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따로 살림을 살기로 결정하자 한 달에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했다.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내가 그에게 지출 내역을 이야기를 하곤 했다. 고정지출 금액은 110만 원인데 뱃속에 아이 아빠의 급여가 100만 원이 안 됐을 때다. 돈 때문에 고민하다가 그는 작은 형부의 소개로 F 식품으로 이직하기로 했다. F 식품의 한 달 월급이 세후 110만 원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려면 월급을 조금 더 주는 곳으로 이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직을 하게 됐다.
임신 8개월 차부터 만 3개월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나에게는 반드시 이뤄야 하는 목표가 있었다. 아이 출산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출산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한두 번 계산한 게 아니라서 목표금액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3개월 동안 최소 80만 원을 모아야 했다. 출산비용 40여만 원, 아기 용품들도 마련해야 했다. 손수건, 내복, 젖병, 기저귀, 아기 띠, 포대기, 아기욕조, 기타 등등 기본적인 용품을 다 사려면 30만 원 이상이 더 필요했다. 제일 비싼 유모차는 언니들이 사주기로 했다. 최소 80만 원에서 90만 원을 모으기 위해 철저히 일하는 부업량을 늘렸다. 하루라는 시간을 쪼개서 사용하기 위해 시간 배분을 다시 했다.
당시 나는 부업으로 한 달에 70여만 원 정도를 벌었다. 2001년 임신했을 때 다녔던 회사의 월급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부업으로 70여만 원을 벌기 위해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부업만 해야 했다. 그는 F 식품 일을 하면서 초저녁부터 잠을 잤고 새벽에 일을 나갔다. 나는 그에게 밥을 차려주고 잠을 자야 하는 그를 피해 큰언니네 집으로 출근해서 내내 부업을 했다. 그리고 그가 새벽에 나가면 일어나서 집에 가져온 부업을 펼쳐놓고 다시 일을 했다. 보통 부업으로 벌 수 있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30여만 원 정도였는데 남들보다 두 배의 일을 하려니 잠자는 시간을 줄여야 했다. 손이 느린 내가 많은 양의 일을 하려고 하니까 그만큼 시간이 소요됐다. 조금 있으면 기말고사도 예정되어 있어서 부업하면서 책을 보며 공부했다.
출산비용 40만 원은 자연분만의 경우에 책정된 병원비 예정 금액이었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정기검진으로 산부인과에 정해진 일정대로 다니고 있었다. 초음파 검사를 하던 의사가 아이가 거꾸로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이대로 출산일이 오면 자연분만이 어렵다고 했다. 아이가 거꾸로 있는 상태로 예정일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해야 한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큰일이었다.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는 입원하는 기간도 길어지고 병원비만 해도 100여만 원이 나온다고 했다. 병원비로만 100여만 원이 소요되면 아기용품을 살 돈이 전혀 없게 된다는 생각에 걱정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 표정이 너무 안 좋았던 것 같다. 병원 의사 선생님이 고양이 자세 운동을 꾸준히 해주면 아이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나는 매일매일 기도하며 고양이 자세로 운동하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야~ 제발 밑으로 다시 돌아가렴~"(아이의 머리가 밑으로 있는 것이 바른 방향이다. 아이의 머리가 사람처럼 서있는 게 거꾸로 있는 방향이다). "엄마랑 같은 자세로 있는 게 거꾸로래 아가야~ 우리 아가 다시 돌아가자." 매일매일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병원에서 알려준 운동을 꾸준히 했다. 일하다가 놓칠세라 알람을 맞추어놓고 꾸준하게 운동했다.
그가 F 식품에서 일하면서 다행히 한 달 식비가 조금 줄게 됐다. 두부며, 콩나물을 종종 가지고 왔는데 그걸로 국과 찌개를 끓여 먹을 수 있었다. 부업으로 버는 돈으로 식비와 집에 필요한 생활비를 쓰고 최대한 돈을 모았다. 그의 집이나 우리 집 부모님의 형편이 빤해서 누구도 우릴 도울 형편이 못됐다. 더구나 나는 임신하면서 엄마에게 드리던 생활비를 못 드리게 돼서 죄송할 따름이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 형편이었다. 오롯이 내가 출산비용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반드시 자연분만을 해야 했다. 집 앞 계단 화분에 풋고추와 청양고추를 심었다. 물만 줘도 잘 자라고 있었다. 고추가 하나씩 나면 고추를 따서 음식을 해 먹었다.
2001년 5월 초까지 아이 자세가 똑바로 되지 않았었다. 나는 간절하게 매일 기도드렸다. 그리고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 5월 초순이 지나 막달이 되었다. 산달이 되니 큰언니네 집으로 부업을 하러 가는데도 그 짧은 길을 걸어가는데 몇 번을 쉬어야 했다. 다리가 시큰거리고 아팠다. 걸어가는 거리가 고작 10여 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거의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걷다가 쉬다가 걷다가 쉬다가 하며 큰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막달에는 배가 많이 나오면서 밥을 먹어도 소화를 잘 못 시키곤 했다. 그리고 막달인데도 여전히 입덧이 있었다.
다행히 계획대로 한 달만 더 고생하면 처음 계획한 돈이 마련될 수 있었다. 그리고 뱃속에 아이는 착해서 자연분만으로 태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뱃속 아이는 임신기간 동안 내내 순하고 착한 아이로 있어주었다. 가끔 발로 차거나 움직이는 게 느껴졌지만 엄마를 힘들게 하지는 않는 아이였다. 같은 자세로 오랜 시간 부업을 하면 가끔 뭉쳤지만 배를 만지고 아이에게 대화를 하다 보면 이내 편안하게 해 주었다. 입덧은 달수가 채워지면서 조금 덜 하게 되었다. 막달까지 조금 입덧이 남아있었지만 계속 심한 건 아니었고 가끔 소화가 안되고 먹은 걸 토하는 정도였다. 그럴 때면 '뱃속에 아이가 싫어하는 걸 내가 먹었나?'라고 생각했다.
5월 중순이 돼서 병원을 갔다. 의사 선생님이 검사를 하면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이가 자리를 잘 잡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안심하면 안 된다는 당부의 말을 해주셨다. 산부인과 병원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오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5월의 하늘답게 푸르고 맑은 하늘이었다. 눈부시게 예쁜 하늘을 보며 감사 인사를 드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막달이 되니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아들이건 딸이건 건강하게만 태어나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드렸다.
큰언니는 임신한 상태에서 기를 쓰고 부업을 하는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큰언니 일 말고도 내 부업을 많이 도와줬다. 나 혼자서는 절대로 못할 양의 일을 맡아서 내가 낑낑대고 있으면 큰언니가 거들어줬다. 그러면 일이 수월하게 끝났다. 내 상황이 어려운 걸 알고 큰언니가 말없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시 작은언니는 둘째를 낳고 계속 병원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작은언니의 둘째는 너무 작게 태어났고 계속 잔병치레를 하고 있었다. 작은언니가 아기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엄마도 작은언니의 아이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5월 말일이 되었고 드디어 90만 원 정도를 모았다. 뿌듯했다. 90만 원을 다 모아놓고 그날 순대를 사러 나갔다. 순대를 사려면 꽤 걸어가야 했지만 가볍게 걸어갈 수 있었다. 임신하고 줄곧 먹고 싶었던 순대였다. 분식집 사장님이 임신한 나를 보며 봉투에 가득 담아주셨다. 임신하면 잘 먹어야 한다면서 순대와 부속물을 살뜰히 챙겨주셨다. 따뜻한 순대를 집으로 가져와서 접시에 담았다. 임신한 후에 예쁘게 먹으려고 조금의 수고를 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대가 너무 맛있었다. 그날 먹었던 순대 덕분에 이후 순대를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5월 31일은 나의 생일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