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아들은 만 두 살이 되었고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린이집과 내가 힘을 합쳐 아들의 기저귀를 떼기 위해 노력했다.
여름 동안은 집에 있을 때 자주 옷을 벗겨놓았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두꺼운 기저귀가 채워져 있으니 아들 엉덩이에 땀띠로 난리가 났다. 기저귀를 갈아주며 분을 열심히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그맘때쯤 거의 기저귀를 떼려고 노력한다는 말도 들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때때마다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제때에 챙겨야 하는 예방접종, 개월 수마다 알맞은 이유식, 분유도 양을 달리해가면서 먹여야 했다. 다른 것들도 평균에 맞춰 계획대로 진행했으니 기저귀 떼는 것도 작전이 필요했다. 감사하고 다행스럽게도 어린이집과 협동작전으로 무. 사. 히. 기저귀를 뗄 수 있게 되었다. 시원한 가을에 아들은 완전히 기저귀를 벗어났다. 이때 정말 기쁘고 감격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3개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어머님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적응해 나갔다. 다소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어눌한 부분은 있었지만 마음이 나쁜 분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함께 산지 두 달째 됐을 때 관장약을 부탁했을 때는 정말이지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아찔했다.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어머님이 재차 넣어달라고 했다. 화장실, 시어머님, 엉덩이를 잊을 수가 없다. 시어머니가 고개를 숙이고 엉덩이가 내 얼굴 앞에 가득해졌다. 그동안 옷으로 가려져 있고 넉넉한 옷을 입고 계셔서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다. 시어머님이 160센티가 넘는 큰 키였기 때문에 더 몰랐다. 덩치가 생각보다 많이 크고 엉덩이가 진짜 아주 많이 컸다. 새하얀 엉덩이를 들이밀었을 때 나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관장약을 어떻게 넣는 건지 볼멘소리를 해보았지만 시도해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비닐장갑을 끼고 관장약을 손에 쥐고 엉덩이를 향해 몇 번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윽~ ' 비위가 상하면서 구역질이 나왔다. 그때 알았다. 그건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계속 엉덩이가 아른거리며 속이 메스꺼웠다. 밖으로 나가서 한차례 소화되지 않고 위에 남아있던 반쯤 삭은 음식물들을 토해냈다. 집으로 들어와서 시어머니께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부터 시어머님의 관장을 남편이 넣어줬었는지 당신이 직접 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어머님은 음식도 많이 드시지만 변을 제대로 못 보셨다. 함께 살게 되면서 한 달에 한두 번 화장실이 막히고 범람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그때마다 화장실을 청소하는 건 남편 몫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화장실 사용을 전혀 할 수 없게 됐다. 화장실이 범람하면 2~3일 동안 개수대에서 양치하고 세수해야 했다. 급하게 화장실이 필요하면 엄마네 집이나 큰언니네 집을 가서 이용했다.
시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고부갈등이 심했었나?'를 생각해 봤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시어머님과 내가 겪는 심적 갈등은 크게 없었다. 다행히 시어머님도 강성은 아니었고 나 또한 시어머님과 반목할 일을 만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살고 있는 가정에는 심하든 소소하든 고부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고부갈등이 심해서 이혼하는 가정이 많은 걸 보면 고부간에 별 탈이 없다는 건 큰 복일 수 있다. 시어머니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었던 나에게 시어머님은 큰 갈등 요소가 될 수 없었다. 시어머님은 어린 손자를 돌보시는 일도 없었고 나와 친분을 쌓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시어머님이 아무 노력도 안 했기 때문에 부딪히는 일도 없었다.
2003년 당시에도 시어머님과 같이 산다고 하면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있을까 봐 주위에서도 안쓰러운 시선으로 봐주었다. 그러나 정작 나의 갈등 대상은 남편이었다. 시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남편은 아주 늦게 들어오거나 집을 나가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술자리를 가졌다. 특히 독수리 오 형제와 술을 마시면 늦은 밤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남편이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나에게 상당한 스트레스가 된 후였다. 남편은 술을 마실 때 과도하게 마시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술에 취하면 그곳이 어디든 자는 사람이었다. 잠이 들면 인사불성이 되고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갈등이 있다면 고부갈등보다는 부부갈등이 더 많았다. 뭔가 잘못을 할 때마다 각서를 쓰고 안 하겠다는 다짐을 받게 되었고 남편이 쓴 각서가 쌓여가고 있었다.
시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아쉬워진 건 여행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살기 힘들고 팍팍한 살림살이었어도 가끔 바람 쐬러 지방에 다녀오곤 했었는데 시어머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그런 소소한 여행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디 잠시 나가더라도 시어머님과 함께 가야 했고 1박을 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리고 식구 한 명이 늘었을 뿐인데 생필품을 자주 사야 했다. 그때 우리의 주말 일상에 <마트 가기>가 하나의 큰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매주 주말에는 필요한 생필품과 음식을 사러 대형마트에 갔다. 가끔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갔지만 걷거나 다니는 걸 싫어하는 시어머님은 대부분 집에 계시고 아들과 남편과 셋이서 마트에 갔다. 주말에 마트를 다녀오면 하루가 순삭 되는 기분이었다. 차 타고 마트까지 가고 주차하고 물품 사고 박스에 담아서 다시 들고 집으로 가져와서 정리 정돈하는데 보통 4~5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맞벌이 부부였기 때문에 생활이 궁핍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유롭지도 못했다. 그렇기엔 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언제까지고 결혼식을 미룰 수 없었다. 혼인신고만 하고 살면서 때때로 결혼식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허전하고 불완전한 부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작은 행사나 사소한 일을 치르려고 해도 돈이 늘 숙제였다. 남들처럼 평범한 절차를 챙기고 살려면 결혼식 자금을 만들어야 했다. 다시 계획표를 작성하고 결혼식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모으기 위해 펜과 머리를 굴렸다.
2003년 가을,주말이 되면 여지없이 행사처럼 집을 나섰다. 겉보기엔 단란한 세 가족이 대형마트로 가는 나들이로 보였을 것이다. 하긴 실제 당시에는 그것이 유일한 우리의 여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마트에 가면 늘 사는 게 정해져 있었다. 생필품과 음식, 시어머님의 필요 물품을 가득 싣고 나면 한쪽 코너로 향했다. 만 2살이 된 아들은 매주 자신의 타이밍을 귀신같이 알았다. 아들만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린 아들이 심사숙고하며 여유롭게 장난감을 하나 골랐다. 그 시간은 진지하고 길고 차분했다. 째깍째깍 시간은 멈추지 않고 그때도 여전히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