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생에 두 번째 예식

셸 위 댄스-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120화

별별챌린지 3기 -31일 차




라이트리스 (꽃말: 고집쟁이, 고결)



생에 두 번째 예식


20살에 아버지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내 생에 첫 예식은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죽음을 맞은 당사자는 아버지지만 예식의 주최자는 유족이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일이라는 날을 기념하고 축하한다. 생일은 살아있을 때 의미 있는 날짜일 뿐이다. 죽음을 맞이한 이후부터 그 사람의 생일은 잊히고 죽는 날짜만 기록하거나 기억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제사라는 의식이 있어서 더 그러하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돈과 사투를 벌이는 이벤트장이었다. 장례식이 오롯이 죽음에 대한 애도 의식이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을까? 슬픈 날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자유는 돈의 여유에서 생긴다는 걸 경험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집안의 큰 어른인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가족은 모두 슬픔이란 감정에 빠져있을 수 없었다. 장례식에 필요한 절차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선택할 때 돈을 헤아려 선택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한 무서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돈이 부족한 집에 안정이나 평화가 머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집안에 1남 3녀 중 막내였던 나는 언니 오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꿈이란 걸 갖는 자율의지는 허락됐다. 그러나 내가 처음으로 꿈이 생겼을 때도 돈의 필요에 의해 딸의 희망을 부모님은 반대해야 했다. 이미 세 명의 자식들이 줄줄이 10대에 일터로 나갔다. 넷째로 막내였던 나 역시 꿈을 꿀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없었다. 생각은 자유였지만 그것마저도 우리 집에서는 나에게만 허락된 사치였다.


없는 집안 형편에 나 또한 언니들과 오빠의 전철을 밟으며 나의 인생은 내 자유의지로 나아갈 수 없었다. 투병을 하는 아버지로 인해 집에 빚이 있었다. 빚 때문에 18살에 회사를 다녀야 했고, 빚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다. 엄마가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21살에 청춘은 가슴이 무너졌었다. 당시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을 찍었고 결국 친구에게 빚을 내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남겨진 가족들은 오롯이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장례식 비용을 생각하면서 장례용품을 고를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웃프기까지 하다. 가난은 유족들에게 슬픔을 느끼고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돈은 아주 중요하고 무섭고 소중한 존재였다. 어린 시절 자식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부모였다. 엄마는 자주 아팠고 신경질적이었다.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 중에 가장 힘이 센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던 90년대 초반에는 병원비가 상당히 비쌌다. 지금처럼 실손이라는 보험도 없었다. 가장이 중병을 앓게 되면 집안 살림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쉬웠다. 그 시절 아버지의 투병이 길어지자 병원이 아닌 집에서 요양하며 지내게 됐다. 돈이 있었다면 적어도 병원에서 치료받을 선택권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돈을 벌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돈을 벌고 싶고 돈을 갖고 싶고 돈 때문에 포기하는 일을 줄이고 싶었다. 특히 아들을 낳고 나니 그 생각이 더 강해졌다. 아직 아무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갓난아기를 보며 결심했다. 아이에게 돈 때문에 가슴 아픈 일은 없게 하고 싶었다. 그건 내가 겪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가난의 대물림은 끊고 싶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롤러코스터가 존재한다. 어쩔 수 없이 태어나는 순간 인간의 생에는 롤러코스터 놀이 기구가 기다리고 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나는 회전목마만 타고 싶고, 유유히 산책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은 때때로 나를 롤러코스터에 앉혀 놓았다.


2001년에 나는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지만 우리 가정에는 공식적인 의식인 <결혼식>이 빠져있었다. 결혼식이 없는 부부, 결혼식 사진이 없는 부부는 당시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수순을 나만 혼자 무시한다는 건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걸 의미했다. 타자의 시선, 공식적인 의식 등은 쉽게 무시할 대상이 아니다. 제아무리 마이웨이라고 우긴 들 나 혼자 편한 대로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그 의식은 '존재의 유무'에 따라 때론 크게 다가오곤 했다. 사소하게 간단한 회원가입서류를 작성하더라도 기혼자에 체크하면 날짜를 표시하게 되어 있었다. 불특정 다수를 만날 때도 기혼자에게 쉽게 결혼 이야기를 물었다. 사소한 것, 사소한 대화에서 결혼식을 못한 것은 큰 허물이라고 지적하는 듯했다.


2003년, 결혼식이란 예식을 시어머님 환갑 식사를 했을 때같이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객들을 많이 부를 생각도 없었다. 친한 사람들이나 가족들은 적어도 자신의 식사비는 가져온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짜봤다. 나에게 결혼식은 일생일대의 아름다운 행사가 아니었다. 의무적인 의식으로 숙제 같은 행사였다. 때를 놓쳐버린 절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숙제를 못한 찜찜함을 증폭시켰다. 때론 당연한 절차의 부재가 장애로 느껴졌다. 최대한 적은 비용을 들여 후딱 해치워버리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이후 내 계획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다.


혹시나 돈이 부족하면 카드로 결제하고 갚아나가자고 생각했다. 결혼식 비용을 내가 다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자금계획을 꼼꼼하게 짰다. 날짜를 잡아놓고 그 기간까지 최대한 돈을 더 모으기로 했다. 허술한 예식이 싫다고 목돈 마련을 해서 결혼식을 치르자니 언제 할 수 있을지 막막하고 요원했다. 나는 나만의 결혼식이면 됐다.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식을 하면 서류에 남길 날짜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었다. 내 생에 두 번째 예식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실행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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