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 병원 진단서를 받았을 때 들었던 감정은 복잡 미묘했다. 시어머님의 이상한 행동이 한순간 모두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앞으로 정신지체 2급 장애를 가진 시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했다. 이전에 모르고 있을 때와는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그전처럼 똑같이 살면 되는 건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밝혀진 과거, 병원에서의 진단이 나온 이후 복잡한 머리와 달리 마음은 편안해졌다. 우선 시어머님의 이상행동에 대해 시어머님과 시시비비를 따질 일이 없어졌다. 그냥 그러려니가 됐다. 나쁘거나 이상한 게 아니라 아픈 거라고 생각하니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복잡했던 머리도 정리를 했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진단 전처럼 그냥 살자는 것이었다.
시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편안해진 것과 달리 남편과 남편의 형에 대한 의문점과 불신이 생기기도 했다. 어떻게 그 같은 중요한 사항을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 평범하게 어머님과 함께 살았다고 말했던 남편이, 그 속내가, 왠지 무서웠다. 남편과 남편의 형도 시어머님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몰랐을 수 있다.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님에 대한 판단을 이성적으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시어머님이 정신병원에 있었고, 자식들과 따로 떨어져 살았다는 걸 이야기해 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님은 20년 가까이 자식들과 떨어져 지냈다. 나는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이란 존재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남편에 대한 마음을 추스르고 정리하는 것은 천천히 미뤄두었다. 그다음 절차로 행정적인 절차를 진행하도록 신경 썼다. 시어머님의 진단서를 가지고 남편이 행정적인 처분을 위해 구청에 접수 신청을 했다. 나라에서 정식적으로 장애진단을 받아두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서류가 접수되고 구청에서 실사도 나왔다. 실사하러 온 사람들이 어머님과 면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고 나서 나라에서 정식적으로 시어머님의 진단에 대한 장애인 증명서가 발급됐다. 병원진단서 소견대로 정신지체장애 2급이 확정되어, 2급 장애인 증명서가 나왔다.
장애 2급을 가진 시어머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걸 찾아냈다. 자동차 명의에 시어머님을 공동소유로 할 경우 경차 자동차에 장애인 스티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혜택은 이런저런 혜택이 수도 없이 많이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당시 이미 임대 아파트 청약접수도 해 놓은 상태였다.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이 같은 일이 있었고 별다른 혜택을 받을 것도 없었다. 시어머님은 자식들이 있고, 그 자식들이 소득이 있다는 이유로 의료보험 수급대상자가 되지도 않았다. 지금 현재 장애 2급인 사람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에 우리가 2급 장애를 인정받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나라에서 받은 혜택은 아무것도 없다. 자동차는 경차라서 굳이 주차 스티커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친정집도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다. 작은언니가 이혼했고 조카들을 아이들 아빠가 데리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조카들을 덜미로 작은언니에게 여럿 차례 분쟁을 일으켰다. 결국 조카들과 떨어지면서 작은언니가 상심이 컸고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작은언니는 엄마 집을 나가서 혼자 월세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친정엄마는 오빠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오빠는 일을 하다가 안 하다가 하는 듯 보였다. 엄마집에 자주 융자가 밀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경매가 진행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가 친정엄마 집까지 도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우리 집은 우리 집대로, 친정집은 친정집대로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변화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었다.
연봉, 월급이 고정된 근로자들은 4대 보험을 적용받고 이미 정해진 급여를 받는다. 박봉일지언정 매달 변동폭이 적다. 반면 성과급제로 급여가 책정되는 영업직이나 프리랜서들은 소득의 격차가 심하다. 목표치 달성 여부에 따라 소득의 차등은 극과 극으로 치닫게 되기도 한다. 나는 20대 초반 세 번의 직장 생활에서 급여제, 혹은 연봉제로 사회생활을 경험했다. 이후 결혼을 한 후부터는 프리랜서로 일했다. 2001년부터 일하던 일은 채권추심업무로 이 일도 성과에 따른 차등된 급여가 책정되어 있는 업무였다. 소득이 실적에 따라 달라졌다. 일한 만큼 더 소득을 올릴 수도 있고 성과가 미미할 경우 소득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2004년 경력이 몇 년 쌓였는데도 소득이 평이한 편이었다. 각 업무별로 소득의 차이도 컸다. 내가 처음 맡았던 업무는 여자들로만 구성된 파트였다. 남자들이 맡은 파트에 비해 여자들이 맡은 파트가 소득이 적었다. 내가 속한 파트는 소득이 적은 대신 편차가 크지 않았다. 업무량은 타 부서와 대동소이했으나 파트별 소득 차이가 큰 편이었다. 그래도 2004년 당시 내 또래 사람들이 다니는 다른 직장에 비하면 적은 소득은 아니었다. 단점은 4대 보험이 안된다는 점이었고 장점은 소득의 편차가 있었지만 일하는 만큼 소득을 조금 더 높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열심히 일했고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경기가 어려워지고 회사 내에서 개편이 일어났다.
인원 감축, 큰 회사건 작은 회사건 회사마다 몸집을 줄이려는 회사가 많았다. 금융권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를 살리려는 노력의 일원으로 인원 감축을 예고했다. 나와 같은 비정규직 프리랜서는 이직을 고려해야 했다. 다행히 몇 년 동안 경력이 쌓였고 실적이 낮은 편은 아니었다. 남편 회사에 아는 분 소개로 은행이나 카드사가 아닌 신용정보사라는 곳을 소개받았다. 회사는 내방역에 위치해서 출퇴근을 하려면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멀고 가깝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소득이 안정적으로 될만한 곳에 소개를 받는 것이 중요했다.
이력서 한 장을 들고 내방역으로 갔다. 간단하게 면접을 봤고 다음 달부터 출근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바로 직장이 잡혔고 내방역까지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서류를 떼서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보증보험을 끊어야 하는데 보증보험에 문제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보증보험회사에 문의를 해보았다. 그런데 나에게 연체가 있어서 보증보험이 안 끊긴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나에게 무슨 연체가 있는지 확인해 봤다. 어렵게 여기저기 확인해 본 결과 보증채무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등줄기가 오싹해지면서 옛날 임신해서 만삭이 다 되어갈 때 서류에 싸인을 했던 게 기억났다. 작은언니가 "넌 싸인만 하면 돼"라고 했던 그때 그 일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