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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이혼도 계획이 필요해

셸 위 댄스-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134화

별별챌린지 3기 -42일 차




호랑이발톱나무(꽃말: 강직, 준비, 보호)



이혼도 계획이 필요해


이혼, 임신하고 그와 함께 살게 되면서 이혼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수도 없이 생각했었다. 이혼 후 어떻게 될지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깊이 생각해 봤고 끝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나는 갑 오브 갑, 철저한 꼰대였다. '결코 내 인생에 이혼이란 없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내고 싶었다. 이혼은 <나쁜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부부라는 계약을 한 사람들이 철저하게 망하고, 실패한 것이었다. 속담은 틀린 말이 없다. 손바닥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쪽만 잘못하는 건 없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루저,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족한 사람들이 부족함의 결과로 결국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부족함을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고, 그걸 안다고 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친정집은 이미 오빠와 작은언니조차 이혼을 했었다. 엄마에게 자식이 네 명 있는데 나조차도 이혼을 한다니 그건 너무나 큰 불효이기도 했다. 아니다. 사실 엄마는 핑계다. 나에게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로부터 독립하는 독립선언문이었다. 결혼은 친정집으로부터 정당하게 나올 수 있는 탈출의 도구인 동시에 독립된 가정의 주체가 되는 일로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다.


엄마만 벗어나면 내 삶을 잘 살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어려운 난관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생활의 실패를 인정하는 이혼이라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간힘을 쓰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해서라도 가정이 끝났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속이더라도 결혼생활 유지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와 정이 없다고 해도, 쇼윈도 부부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스스로 이혼이라는 낙인을 찍고 이혼녀가 될 수 없었다.

2005년, 27살이었다. 10대 때부터 내가 꿈꾸는 삶의 방향이 있었다. 젊었으니 주변에 아직 결혼 안 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결혼의 실패를 이해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사회적으로 그저 실패한 사람이 될 것이 뻔했다. 이미 결점이 차고 넘쳤다. 절차도 무시하고 사고를 쳐서(임신해서) 결혼했다. 남들이 손가락질할 원인을 제공했고 구설수에 오를 일은 충분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고 과정은 지나간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황혼, 끝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다. 살면서 중요한 기준들이 있었다. 모범적인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어린 시절 불후하고 부족했지만 어느새 세월이 지나 이미 성인이었고 인생에 책임을 져야 했다. 결혼을 했다는 건 이미 그 모든 책임은 다름 아닌 나에게 있다는 걸 의미했다. 부모를 탓할 수도 환경을 탓할 수도 없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노력하는 대상은 성인이 된 부부 두 명뿐이기 때문이다. 낙오자, 낙오자, 나는 낙오자가 될 수 없었다.


요즘은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변을 둘러봐도 쉽게 발견한다. 황혼이혼, 졸혼, 이혼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변했다. 그건 너무나도 높아진 이혼율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05년은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인 생각을 가질 때였다. 또한 20대의 이혼율은 누가 봐도 당연하게 설익고 부족한 결점으로 비쳤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회적 평가도 중요했다. 패잔병이 되어 인생의 낙오자가 되기 싫었다.


남편과 싸울 때, 그가 크게 잘못했을 때 각서를 받았었다. 집을 나갔다 들어온 후에도 각서를 받았었다. 처음 집을 나갔을 때 충격을 받았고 두 번째 집을 나갔을 때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집을 나갔을 때는 더 이상 충격을 받지 않았다. 나는 두 번째 그가 집을 나갔을 때 내가 사정하고 빌면서 그를 집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는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이 집을 나갔다. 내가 빌었던 것이 나 스스로에게 두고두고 창피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똑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후에 그가 집을 나가서 죽는다고 협박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그에게 빌지 않았다.

그는 외박하는 일이 잦았다. 우리가 싸울 때마다 새벽 2시 이후에 들어오는 건 외박이라고 못을 박았었다. 처음에는 그가 안 들어오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늦게 들어오는 때는 잦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나는 피곤에 물들어있었다. 그 이후 그가 늦더라도 그냥 잠을 잤다. 그가 외박을 할 때마다 우리는 말다툼을 했다. 나는 그의 버릇을 고치고 싶었다. 아이를 대하듯 싸우고 얼르고 달래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각서를 썼다. 시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집 나가는 게 잠잠해졌었다. 그러나 시어머님이 있다고 해서 집을 한 번도 안 나간 건 아니었다. 외박이나 집을 나가는 건 종종 있는 분기 행사였다. 그때마다 큰소리가 날까 봐 밖에 나가서 싸우거나 서로 합의를 봤다. 그에게 받는 각서가 늘어났다.


처음 각서를 쓸 때보다 두세 번 이후부터 각서 내용이 상세해졌었다. 그럴 대마다 각서 내용에는 '한 푼도 없이 내보낼 것'이라는 내용을 쓰게 되었다. 그가 집을 나가는 게 나쁜 습이요,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에게 더 큰 책임감과 의무를 강조했다. 각서 내용이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각서 내용에 그가 잘못을 해서 이혼을 할 경우 아들도 그가 키우도록 하겠다는 내용도 포함해서 각서를 썼다. 나는 양육비를 안 줄 것이며 그가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이 각서에 포함됐다.


그러나 결국 나는 세상에 포기 선언을 했다. 철저하게 내가 결혼에 실패한 걸 받아들였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싸우고 반목하는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지 않기 위해 이혼을 결심했다. 도저히 그와 살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섣불리 이혼을 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이혼은 사회적 계약이므로 <계획>이 필요했다. 이혼을 할 경우 아들의 양육을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막상 그와 이혼을 결심하고 나자 '아들을 결코 그에게 맡길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가족이고 지켜야 하는 존재였다.

이혼하는 절차, 과정, 그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해 써치 했다. 그리고 무료상담을 해주는 곳에 전화로 상담을 받았다. 유책 배우자에게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는 점을 유심히 봤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반드시 증빙이 필요했다. 상담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각서가 아주 중요한 증빙서류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급여통장도 증거가 된다고 했다. 재산분할과 위자료, 양육비 등 이혼을 할 때 중요한 건 돈에 대한 사항이란 것을 알게 됐다.


이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 인생을, 내 아이를 그와 같은 공간에서 공유하거나 키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혼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필요한 서류들을 모으며 하루하루 준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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