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엄마

셸 위 댄스-상처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사람

by 장하늘

19화.




사람


5) 엄마


<만족, 감사> 와는 거리가 먼 우리 엄마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억울한가 보다. 어쩌면 그 한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당연할지 모른다. 비약적인 발전을 한 대한민국이지만 100년 동안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있었겠는가? 우리의 부모세대가 각자 고난을 겪은 건 우리 세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개개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드라마와 역사가 있을 것이다. 격변하는 대한민국의 40년대~60년대 어른들 각자의 인생과 그 노고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엄마에 인생을 요약해 보면 8남매 중 세 번째로 태어났고 딸로는 둘째다. 아들선호 사상으로 가정형편은 좋은 편이었지만 딸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외할아버지는 생각하셨다고 한다. 아들은 중. 고등학교에 보냈지만 딸들은 초등학교만 겨우 보내셨다. 엄마도 초등학교만 졸업하는 것으로 배움을 끝맺음했다. 체조도 잘했고 노래도 잘해서 재능은 많았지만 재능을 펼칠 용기가 없었고 환경도 못 되었다. 욕심은 많고 꿈도 많았지만 그 시대 많은 분들이 그랬듯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일찍이 돈벌이에 나섰다.


18살 충남에서 서울로 상경했고 슈퍼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하던 곳에서 손님으로 왔던 아빠에게 보쌈을 당해 시집갔고 첫아이로 딸을 낳으면서 시댁에서 눈총을 받았다. 원치 않은 결혼이었지만 자식을 낳았으니 살았다. 남편은 도박을 했고 시어머니는 자신에게 가혹했다. 자식을 넷을 낳았지만 첫째 딸 이후 둘째 아들 셋째, 넷째 딸을 낳으며 아들이 귀한 종갓집이었던 시댁에서 더욱 입지가 위축되었다.


그나마 아들 하나가 위안이었다. 막내를 낳고 젖먹이 아이를 떼어놓고 이혼하려고 집을 나갔었다는 엄마. 어린 자식이 눈에 밟혀 다시 돌아와서 아이들을 키워냈다. 살다 보니 남편은 투병을 하고 당신은 신병으로 고생하며 나이가 들었다. 39살에 큰딸이 손자를 낳으며 할머니가 되었고 40대에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었다. 아들 하나 있지만 아들은 이혼하고 손자들도 자신에게 맡긴 채 돈벌이에 소홀했다. 딸들이랑 같이 살면서 손자들을 키워냈다.


어릴 때 나는 엄마가 너무 무서웠었다. 작은 잘못이든 큰 잘못이든 화를 잘 냈기 때문이다. 혼나는 게 일상이었던 우리 형제들은 엄마에게 혼이 나면 우리들이 큰 잘못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엄마는 늘 아팠고, 밤낮이 바뀌어 낮에는 잠을 잤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학교에 가기가 두려웠다. 툭하면 준비물을 못 챙겨가서 선생님께 혼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아침에 학교 준비물을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그날은 매타작을 받는 날이었다. 준비물도 못 챙기고 맞은 곳은 아픈데 학교에 가면 또 벌을 섰어야 했다. 학교 가는 길이 지옥길 같았다. 엄마의 예민한 신경질을 받아내는 건 어린 자식들에겐 너무나도 버거운 형벌이었다.


엄마의 네 자녀들은 결핍된 생활 속에서 자라났다. 엄마의 병증은 엄마의 몸과 마음만 병들게 한 게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마음의 병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어긋남 없이 어른이 되었다. 각자 나름의 아픔과 결핍을 꽁꽁 숨기며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각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친정집에 대한 결핍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부모의 빚을 갚는 건 모든 자식들의 숙명이었다. 각자의 배우자에게도 다 말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이해보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고 편견을 낳을 수 있는 가정환경을 입 밖으로 내는 건 누워서 침 뱉기 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형제자매들 모두 지금은 4.50대가 되었다. 우리 자매들은 서로 친하다. 오빠와도 나름 잘 지내고 있다. 같은 부모 아래에서 아프게 자라난 우리들은 마치 전우애가 생긴 전우 같다. 엄마는 여전히 세상에 불만이 많고 억울한 게 많다. 그러나 지극히 동물적인 감각이 강한 엄마는 자식들이 돈을 벌면서 순화되었다. 엄마가 변한 건 어쩌면 복합적인 일들이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변화를 일으킨 건지도 모른다. 가끔 나는 엄마의 독기가 나이가 들어서 빠진 것인지 약육강식에 의한 순종인지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보다는 무척이나 착해진 건 확실하다. 게다가 엄마는 자식들이 어렸을 때는 밥을 잘 못 챙겨줬지만 성인이 된 자식들과 손자들의 밥은 잘 챙겨주신다. 밥 짓는 것으로 죄갈음을 하듯 열심이시다. 우리들은 아직도 엄마에 대한 상처가 있지만 자식들 모두가 엄마를 너. 무. 나. 도. 사랑한다.


각자 아직도 아프고 시리지만 늙고 아픈 엄마를 걱정하고 챙긴다. 우리들은 형제자매들은 욕심 많은 엄마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 놓는다. 엄마를 사랑하는 자식들은 속이 상하고 아파도, 이해가 안 가도 엄마를 위해 그저 해야 할 도리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를 향한 자식 된 의무감은 나를 강하게 한다. (작년에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작은 언니와 나는 큰 각오를 해야 했다. 이건 추후에 다시 이야기할 부분이다.) 최근에 엄마는 당뇨가 심해져서 여기저기 계속 병치레 중이며 이번주엔 발에 염증이 생겨 깁스까지 했다. 그런 엄마를 위해 작은언니와 나는 오늘 반창고를 사고 초밥을 사서 집에 들어갔다.


'사랑은

~때문에 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 격하게 동감한다.


엄마가 무엇을 하더라도

나는 언젠가부터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다만, 고민한다. 그리고 해결한다. 몸이나 정신이 아파서 하는 행동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해하려고 하면 오히려 상처받는다. 다만 받아들이고 문제는 해결하면 된다. 엄마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생각하면 이해하는 게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자식이기에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엄마를 사랑한다는 걸 인지한다. 엄마가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 가끔 놀랄 일이 있더라도 그걸 해결할 만큼 우리 자식들이 어른이 된 것에 감사하다. 엄마가 조금은 더 즐거웠으면 좋겠고 안 아팠으면 좋겠다. 엄마와 시간을 보내는 요즘은 내 삶에 아주 소중한 나를 위한 치유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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