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경기도 부천에서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님 슬하에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자기소개서를 쓴 기억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소 거리가 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엄격하긴 해도 유머러스한 아버지와 무섭고, 신경질적이고 늘 아팠던 어머님'이 비슷한 표현이다. 아버지는 부천에서 청소 감독직으로 일을 하시다 병을 얻으셨고 내가 중학생일 때부터 본격적인 투병이 진행됐다. 폐쇄성 폐 질환과 심장판막증 등 만성적인 호흡기 질환이 있어 심할 때마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다. 병원비가 상당해서 집에 산소호흡기를 설치했고 장기간 집에서 요양치료하셨다. 6년이 넘게 투병을 하시다 당신 나이 환갑이 되기 전에 고통스러운 질병과 이별하며 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의 부재로 가장 힘들어하신 건 엄마였다. 오랜 투병으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여러 차례 푸념했던 것이 떠올라서 그런 엄마의 모습은 아이러니였다. 막상 아버지가 죽자 과부로 살아갈 본인의 처지에 가슴 아파했다. 이때 나는 인간의 슬픔이, 고통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인지 알게 된 것 같다. 부모가 죽어도 부모의 죽음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고아로 살아가야 하는 본인의 처지에 가슴 아파함이라니 먼가 서글펐다. 엄마는 깊은 슬픔에 빠진 듯 3년 이상 힘들어했다.
막내딸로 나름 사랑받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고 많지 않다. 국민학교 운동회에 와서 맛있는 거 사주셨던 것, 가족끼리 짜장면 집에 가서 외식했던 것, 도시락을 못 싸가는 자식들에게 용돈 주셨던 것,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막내딸을 위해 수제비 끓여 주셨던 것, 아빠가 일하셨던 대기소에 갔을 때 바댄바댄 햄 소시지 프라이팬에 구워 주셨던 것, 참새고기 구워 주셨던 것, 쓰다 보니 죄다 먹을 거와 관계가 있다니 기억이란 게 참 편협하다. 아버지는 특이한 음식들을 좋아하셨다. 생고기도 좋아하셨는데 소고기뿐 아니라 닭, 돼지도 즐기셨다.
아버지는 키도 큰 편이셨고 젊었을 때 사진이 집에 딱 한 장 있었는데 제법 훤칠하니 잘 생기셨었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던 것, 낚시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것, 가끔 트로트 노래를 부르셨던 것이 기억난다. 단편적인 기억 중에 특별하게 기억되는 한 장면의 모습도 있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아버지는 늘 옥상으로 올라서 지방 쓴 종이를 태우셨다.
어느 날은 평소와는 달리 아빠 혼자서 제사를 지내셨고 옥상에 올라가신 아빠를 따라 나도 올라갔었다. 그런데 아빠가 울고 계셨다. 아버지는 종갓집 독자로, 장손이셨다. 동생들이 있었다는데 모두 단명하셔서 아버지는 형제자매가 없으셨다. 그래도 종손이셨기 때문에 명절이나 제삿날은 늘 손 아래 당숙분들을 맞이하셨다. 그런데 어렸던 나는 잘 모르는 집안에 어떤 이유로 제삿날 친지들이 발길을 끊게 되었던 것 같다. 그날 난 처음 아버지의 눈물을 봤다. 아프기 전이셨기에 내겐 늘 거대하게만 보였던 아빠였다. 그런 분이 옥상에서 소리도 없이 서럽게 울고 계셨다.
아빠가 97년도에 돌아가시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가족이란 그런 것일까?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나는 아버지 생각을 하면 늘 든든하고 좋았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 그렇게 크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별을 하고 나면 좋은 기억만 남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대로 상상하고 신격화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돌아가심으로써 더 큰 산이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지붕이고 기둥이었다. 투병하실 때는 약하고 가슴 아픈 아버지셨다. 그리고 돌아가시고 빛이 되고 달이 되었다. 가족은 함께 할 때도 의미가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의미가 있다. 하늘의 별이 된 아빠는 기억의 단편 만으로도 내 삶에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