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자 처음으로 성적표를 받았다. 반 석차 52명 중 31등을 했다.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증명서 같았다. 31등? '말도 안 돼!' 내가 꼴찌가 아니라고?' 그건 놀라운 성적이었다. 52명이 총인원이면 당연히 나의 반석차는 52등 이어야 했다. 국민학생 때 유급을 여러 번 당할 뻔한 내가 아닌가? 국민학교 졸업을 간신히 한 저능아였는데 나보다도 성적이 안 좋은 아이가 반에서 절반가량이나 된다고? 신기하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성적표를 공개했었다. 교실 뒤 게시판에 반 석차가 그대로 전체 공개됐다. 나는 성적표를 보다가 그 자리에서 한참을 굳어있었다.
중학교 배정이 도당 국민학교에서 거리가 있는 내동중학교로 배정되어 같은 국민학교에서 온 아이가 별로 없었다. 그중에 경 0은 국민학교 때 안면이 있는 아이였다. 물론 나와 친하지 않은 아이였다. 경 0은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나와는 다른 부류의 아이였다. 피아노를 잘 쳤으며 인기도 많았다. 깔끔하게 다녔고, 옷도 예쁘게 입고, 얼굴도 예쁜, 공주님 같은 아이였다. 그녀는 인기 있는 아이였고 나는 반 아이들이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다. 공개된 성적표를 보다가 경직된 건 32등 때문이었다. 31등 뒤인 32등이 다름 아닌 경 0였다. 한참을 봤다. 그 경 0? 혹시 동명이인이 있을까 봐 성적표 뚫어져라 봤지만 경 0이라는 이름은 반에 단 한 명이었다. 맙소사. 내가 그녀보다 시험을 잘 본 것이다.
<비교>를 누가 안 좋은 것이라고 했는가? 첫 성적발표 후 나는 중학교에서 태도가 좋은 아이들 쪽에 편입되었고 곧바로 성실한 학생이 되었다. '경 0처럼 예쁜 아이는 아니지만 경 0보다 성적이 더 잘 나왔다는 건 나에게도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세상 누구도 칭찬하지 않았는데 성적표가 칭찬해 주는 것 같았다. '넌 바보가 아니야, 너도 하면 되는 아이야' 희망의 불빛이 반짝거리며 머릿속 전구에 불을 밝혔다. 경 0이라는 존재는 넘사벽으로 다른 세상의 아이였다. 동경했던 아이와 뜻하지 않은 비교가 수면아래서 잠자고 있던 나의 의식을 깨웠다. 열기구가 하늘을 날기 위해 준비하듯 가슴속에 뜨거운 열기가 채워졌다. 작은 꿈틀거림은 자의식을 깨우고 자신감에 싹을 틔웠다. 희망을 품은 심장이 팔딱거리며 속삭였다. 넌살아있어, 그러니 너의 인생을 살아가!
사춘기, 생각이 넘쳐나는 나이였다. 자아 성찰은 꿈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꿈이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틔우려고 영양분을 흡수했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꿀 수 있는 꿈을 꿔야 했다. 어린 나이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가정형편이 별로 좋지 않으니까 일을 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어떻게 살고 싶지?' 사춘기의 생명력은 깊게 사색하게 했고 생각을 확장시켰다. 생각의 꼬리가 이어지다가 멈춘 곳은 <여행을 하며 살면 좋겠다>였다. 막연한 꿈이었지만 중학생 때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모범생으로 성적을 올리는 데 열중하며 지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