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이 없는 옮긴 직장은 통신 채권 관련된 업무를 하는 곳이었다. 외근할 필요도 없고 앉아서 전화 업무만 하면 되는 곳이었다. 자리에 배정받은 첫날은 일을 시작하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다음날부터 도시락을 싸서 출근했다. 점심시간에 주섬주섬 도시락을 꺼내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도시락을 먹는 언니들이 같이 먹자고 해주어서 그제야 사람들을 확인했다. 점심 먹으면서 언니들이 일하는 팁을 알려주었다. 대부분 나이가 많은 여성으로 이루어져서 내가 어린 축에 끼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일하는데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6시가 되기 전부터 책상 정리를 다 끝내놓고 칼퇴근을 위해 몇몇 분들이 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5시 50분에 업무가 끝난 것처럼 정리를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55분에 컴퓨터까지 껐다. 6시 땡 소리가 나는 것처럼 자리에 앉아있던 언니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서둘러 사무실을 나가는 언니들을 보며 나도 그들과 발맞추어 길을 나섰다. 이전 회사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라서 그곳만의 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티 안 나게 그들 무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칼퇴근을 하게 되었다.
퇴근하는 발걸음은 경보를 하듯 빠르면서도 경쾌하다. 아들을 데리러 가는 길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어린이집을 유치원으로 바꾸면서 훌쩍 자란 아들이 제법 의젓해 보였다. 어린이집에 맡길 때는 드라마가 펼쳐졌다. 아침마다 모자의 이별 장면은 애절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듯 슬프고 아픈 이별 장면을 방불케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인데도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볼 때마다 고민이 될 정도였다. '이렇게 아이를 떼어 놓으면서 일해야 하나 싶고 돈이 뭔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린 자녀를 두고 일하는 워킹맘들에겐 그들만의 허들이 생긴다. 아침에 울면서 헤어졌으니 아들을 보러 가는 발걸음에 속력이 붙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 아침 드라마에 차차 변화가 생겼다. 어느 날부터 헤어질 때 슬픈 장면 연출이 차츰 적어졌다. 이주일 정도 지나고 나니 하루는 살짝 울먹이다가 웃어주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한 달 정도가 되니 상쾌하고 산뜻하게 인사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아들이 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유치원에 다니면서 친구들을 보며 의식하게 된 것 같았다. 같은 반 동갑 여자아이 00 이가 워낙 울지도 알고 활발해서 그런지 00 이를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궁금증이 생겨서 00이 예쁘지?라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말하는 게 신기했다. '아들이 벌써 좋아하는 친구가 생긴 걸까?' 궁금해졌다. 몇 달이 더 지났고 나는 아들이 00 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또다시"00이 예뻐?"라고 물었더니 "엉"이라고 대답한다. 질문을 바꿔봤다. "00이 좋아?" 그랬더니 "무서워!"라고 아들이 대답했다.
의외이기도 하고 아들의 말이 어이가 없어서 왜 무섭냐고 물어보니 아들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00 이가 자꾸 때린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말에 놀라서 유치원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심한 건 아니고 놀면서 자꾸 또래 친구들을 때리긴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하루는 그 말이 신경 쓰여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걸 확인했는데 00 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00 이는 예뻐, 00이 예쁘지?" 00 이가 스스로에게 먼저 자신이 예쁘다고 말하며 아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대답했다. "엉"
ㅎㅎㅎ 00 이가 참 귀엽고, 아들은 웃기고, 그 장면을 보고 나는 소리 내며 웃어버렸다. 아들의 핑크빛 사랑은 아직 먼 훗날의 일인 것으로 확인됐다. 다행히 00 이의 손버릇은 심각한 정도도는 아니었다. 친구들끼리 놀다가 툭툭~ 때리는 것으로 확인됐고, 큰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두기로 했다.
나는 남편과 잘 지내보자고 서로 이야기했고 다짐을 하면서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됐다. 이미 망가진 마음을 추스르고 다짐하고자 아들에게 동생을 만들어주자고 남편과 이야기했고 계획을 세웠다. 임신이 잘 되는 나는 계획하고 바로 두 달 후에 임신이 됐다. 7주 차가 됐고 병원에 가서 확인을 했다. 임신이었다. 그런데 8 주차부터 하혈이 조금씩 있더니 2주 만에 유산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