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덮어놓은 채 다시 일상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린이집에 아들을 맡기고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에서는 일에 집중했고 늦게까지 야근하곤 했다. 저녁식사 때를 벗어난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와서 저녁밥을 짓고 남편이 오면 저녁을 먹었다. 학교 다닐 때는 마음 편하게 책 한 권, 드라마 한 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졸업 후에는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시어머님 병원을 다녀왔고 두 달에 한 번은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매번 아버지 산소를 갈 때마다 그에게 부탁을 해야 했지만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는 것이 나에게는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중요한 의식이었기에 비위를 맞춰서 다녔다. 분기별로 한 번씩은 바닷가를 다녀오거나 여행을 하기도 했다.
이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회사는 불편한 장소가 되었다. 불과 두세 달 전 이혼을 결심하고 직장동료 k와 은밀한 관계가 됐었다.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기 때문에 분명히 그와 나는 불륜 관계였다. k와 이별을 구체화하거나 특별하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와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와 만난 건 남편과 이혼을 하기 위한 확실한 <나쁜 행동>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 계획이 무산되자 그와의 관계가 불필요하고 불편한 관계라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나대로 살기 바쁘고 복잡한 마음을 정돈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친정집에 변화가 생겼다. 내가 중학교 때 이사했던 빌라 집이 결국 경매가 돼서 친정엄마가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빌라 집은 아버지가 아버지 명의로 된 집을 처음으로 구매하고 마지막까지 살다 간 집이었다. 집을 살 때만 해도 주변 부동산 시세보다 신축빌라라서 근처 집들에 비해 가장 비싼 빌라였다. 막상 이사를 간다고 하니 10여 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 엄마, 우리 가족들이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시간들, 가족들의 변천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차려놓은 거실의 불당, 부모님은 안방, 처음엔 작은 언니와 나의 방이었던 작은방, 15평 빌라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작은방은 주인이 수차례 바뀌기도 했다. 처음엔 작은언니와 나의 방, 작은언니가 수원 기숙사로 가면서 잠시 나 혼자만의 방, 이후 오빠가 새언니와 처음 살림을 차리며 작은방은 신혼 방이 되었다. 이후 오빠가 분가하고 다시 작은언니와 내가 사용하다가 작은언니의 첫 살림방이 되며 다시 신혼 방이 되었다. 매번 신혼 방이 될 때마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집도 절도 없이 생활해야 했다. 안방은 아버지가 투병을 하면서 병실이 되기도 했다. 마당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장례식장이 되기도 했다. 많은 일이 있었던 집이 결국 경매로 넘어갔다.
엄마는 살 곳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셨다. 나는 시어머님이 입원했다가 두 번째로 쓰러지며 버거운 병원비까지 짊어지게 되면서 친정집 일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작은언니도 따로 나가서 생활할 때라서 집을 얻고 생활하는 걸 엄마가 알아서 진행했다. 대출금 갚느라 매번 돈 때문에 힘들었지만 어엿하게 마련된 자기 집에서 살았던 엄마였다. 남편이 죽고 결국 자식들은 모두 성장하고 할머니가 된 늙은 나이에 엄마는 돈 한 푼 없이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자식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다. 엄마는 집을 알아보시다가 결국 부천에서 가장 저렴한 심곡동 쪽 다세대 밀집 지역까지 가서야 집을 얻을 수 있었다. 반지하 월세방이었고 살림살이를 다 옮길 수도 없는 좁은 집이었다. 그 당시 엄마는 오빠와 오빠의 자녀 두 명을 모두 건사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이사하면서 야근일 때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우선 아들 어린이집을 변경해야 했다. 수소문하며 알아본 끝에 인근에 병설유치원을 알아봤고 그쪽으로 아들을 보내게 되었다. 유치원이라서 조금 더 체계적으로 아이를 돌봐주는 것 같았다. 상황이 변해서 야근을 거의 할 수 없을듯했다. 회사에서 안 그래도 불편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이직을 결심했다. 핑계 김에 모든 것이 잘 된 것 같았다. k와 마주치는 것도 불편했고 야근을 할 수 없는데 나만 편의를 부탁할 수도 없었다.
회사에 팀장님 중 이 팀장님은 남편과 알고 있는 분으로 처음 신용정보사로 올 때부터 소개를 해주신 분이었다. 집안 사정을 알고 계셨던 터라 많은 부분 신경 써주시는 이 팀장님께 한 가지를 더 부탁드렸다. 시어머님까지 아픈 상황이니 소득은 그냥 그렇더라도 야근이 거의 없고 좀 일찍 끝날 수 있는 곳 자리가 있으면 추천을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이 팀장님이 소개해 주셔서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 본 회사에서 다음 달부터 출근을 하라고 했고 회사에 말씀드리고 그달까지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보름만 더 회사를 다니면 됐다. 그런데도 매일 회사에 가는 게 편치 않았다. 직장동료 k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정 거리를 두고 지냈다. 이혼이 무산되면서 나의 행동이 나쁜 행동이라는 자각이 더해졌다. 싸늘하게 식은 감정으로 거리를 두자 직장동료 k도 이렇다 할 내색을 하지 않았다. k와는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 간단하게 인사를 한 게 전부였다. 건강하게 지내라는 인사만 하고 첫 신용정보사와도 k와도 작별했다.
친정엄마가 이사 간 후에 엄마네 집에 거의 가지 못했다. 나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자주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큰언니네 바로 앞집이 경매로 넘어간 우리들이 살았던 우리 집이라서 큰 언니네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살던 집에서 5분만 걸어가면 경매로 넘어간, 우리 집이 나왔다. 나는 한동안 그쪽으로 걸어가지 않고 큰길을 나갈 때도 둘러 가면서 그 집을 외면했다. 집을 보면 내가 외면하고 사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살아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를 애써 외면하고 살듯이 경매로 넘어간(아버지가 생에 처음으로 구매했고 마지막으로 살다 간) 집을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