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했다. 마음이 평온했다. 그보다 더 편안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팅, 9층입니다.' 그가 집을 나가고 엘리베이터 소리가 문밖에서 희미하게 났다. 그가 건물을 빠져나가는 시간은 3분이 안 걸렸다. 그때 대문을 모두 걸쇠로 걸었다. 안쪽에서만 걸 수 있는 2중 잠금장치까지 모두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가 마음이 바뀌어서 돌아와도 내 집에 그를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그가 집을 나간 게 벌써 여러 번이었지만 전에 없었던 마음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편안했고 안락했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전혀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앞으로 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만 가득했다.
아침이 되었다. 잠을 잘 잤고,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자기 전에 전화기를 만져 수신차단을 했다. 이전 같았으면 그에게 전화를 많이 걸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의 감정처럼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겁이 났었다. 그런데 그에게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차단까지 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보조키를 들고 나왔다. 이사 와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키를 한 개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내가 없을 때 집에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회사에 가서 별일 없는 듯 일하고 퇴근했다. 아들을 유치원에서 데리고 오면서 왠지 불안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혹시 그가 있을까 봐 두리번거렸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다 잠그고 걸쇠를 걸었다.
아들을 꼭 안아주었다. 아들과 유치원 이야기를 하고 표정을 살폈다. 어리지만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걸 모두 아는 것 같았다. 아들에게 미안했다. 혹시라도 아들이 불안해할까 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놀았다. 씻기고 밥도 챙겨주었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에게 전화가 없었다. 만 하루 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이대로 며칠 더 연락이 없어도 좋을듯싶었다. 전화기를 보며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을 했다. 이대로 두어야 하나? 아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수신차단은 풀어놨다.
밤에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11시 30분쯤 잠자리에 들었다. 혹시 늦잠 잘까 봐 걱정돼서 전화기뿐 아니라 시계도 알람을 하나 더 맞춰놨다. 잠이 들었다. 그가 사라졌지만 어제에 이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전화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이 깼다. 전화기에 '남편'이라는 문구가 떠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그의 전화다. 받기 싫었다. 시끄러운 소리를 꺼버리기 위해 전화를 받았다. 남편의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전달됐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왜?"
건조하고 딱딱한 음성이 나왔다.
술을 많이 마신 건지 전화기 속으로 전달되는 그의 목소리에 진한 취기가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꾸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그의 음성이 들렸다. 죽고 싶다는 그의 말소리가 귀에 닿았다. 할 말이 없었다. "나 내일 일어나야 해~ 전화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나에게 이런 목소리가 있었나 싶은 침착하고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가 무슨 말인가 더 이어나갔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나 잘게. 전화하지 마" 전화를 끊었다. 벨 소리를 진동으로 바꾸고 다시 누웠다.
잠을 청하려는데 불현듯 '그가 죽는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가 집을 나갔을 때마다 나는 패닉 상태가 되곤 했다. 죽고 싶다는 그의 말이 무섭고 아찔했다. 그는 집을 나갈 때마다 그 말을 하곤 했다. 나는 그에게 살아서 집에 돌아오기만 하라고 빌곤 했다. 그가 죽는다면 아들에게 아빠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전에는 그랬다. 그런데 그 밤, 그가 죽는다면? 그렇다면 '이혼을 하지 않고 헤어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과 사별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이혼보다는 사별이 낳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시선, 평가는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가정을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우리 친정집에는 오빠도, 작은언니도 이혼을 했다. 나마저도 이혼을 하면 제대로 콩가루 집안이 되는 것 같았다.
이혼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건 나만의 안위나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세상의 편견에 순응하며 살았다. 이혼은 가정이 깨지는 것이다. 남들에게 비난받기 십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바닥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이혼하는 사람들은 각자 서로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알곡이 꽈~악 들어찬 슈퍼 꼰대다.
그런데 사별을 한다면?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전화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동소리가 느껴졌다. 손을 뻗어 수화기를 잡아야 하는데 잠이 깨지 않았다. 깨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 스친 생각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