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작은 깃털 하나 보태지 않아도 나는 심신이 망가져있었다. 두 번의 유산 이후 손목을 거의 쓰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음료수 캔조차 딸 수 없었다. 손목에 약간의 스냅만 사용해도 기분 나쁘게 전율하며 통증이 느껴져서 눈을 질끈 감게 됐다. 시큰, 하면서 찌릿한 통증이 날 때면 입안에서 쓴맛이 느껴지고 비릿한 향이 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무거운 건 잘 드는 편이다. 하체도 튼튼하고 팔힘도 나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목을 사용하는 일은 하기 힘들어졌다. 마치 연약한 여자가 된 것처럼, 물병을 따거나, 캔을 따야 하는 건 웬만하면 옆에 사람이 있으면 부탁하게 되었다.
말다툼을 하다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그가 쏟아냈다. 그 말들은 고스란히 상처가 되었다. 그가 수시로 집을 나갈 때 나의 존재는 늘 너무 하찮은 존재가 되곤 했다. 지난번 칼이 등장했을 때 나는 하지 말아야 하는 말도 했다. 왜 그날 아들을 언급했던 것일까? 아들을 언급하면 그가 집을 안 나갈 줄 알았던 걸까? 칼을 가지고 실랑이를 할 때 아들 생각해서라도 나가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돌아온 말들은 참혹했다. 그날 남편은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아들의 존재마저도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했었다.
'어떻게 그런 말들을 할 수 있었을까?' 남편뿐 아니라 사람들이 심한 말을 할 때 오랫동안 했던 생각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면 사람은 화가 나면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실언. 그래 실언이었을 것이다. 그랬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화가 나면 말에 제동장치가 풀리게 된다. 말실수를 많이 했다. 나 또한 그럴진대 남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나 사이에 당시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아들을 부정하는 언어가 되어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겨냥한 말은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그가 한 실언은 내가 아들을 방패 삼으려고 한 나의 잘못이다.
나이가 들어서 불혹이 넘은 어느 날 나는 그냥 스스로 선언했다. <앞으로 인간을 이해하려 하지 않겠다. 다만 받아들이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판단하겠다.> 반백년 가까이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수많은 만남과 이별에서 나의 오만과 편견을 인정했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구나~, 아니 나는 타자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구나~'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나처럼 부족하고 미련하고 모르는 게 많은 인간은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다만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해 나가겠다고 생각했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멀리하면 그뿐이었다.
유산을 하고 다음날 회사에 출근했다가 하루 종일 버티며 야근까지 했다. 회사 동료들이 내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이니까 밥을 먹고 가라고 했었고 음식점에 잠시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고기 한 점도 못 먹고 일어났던 자리였다. 거기 잠시 앉아 있었다는 것이 '나의 잘못'이 되어 싸움이 됐다. 지쳐 있었던 나는 그에게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건지 물었다. 아마도 그만 괴롭히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다시 무기가 되었다. 그의 말은 결국 <내가, 나라서, 죄>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에게 '죄'였다.
그때의 싸움에서 이미 나는 패자가 되었다. 그와 싸우는 것 자체가 싫었다. 싸울 마음이 들지 않으니 싸움도 하기 전에 이미 패자가 된 것이다. 나는 싸울 때 어떻게든 대화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이 안 나는 것 같았다. 의지가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치고 힘들고 피곤했다. 평소에 나오지 않던 표정과 냉소가 나왔을 것이다. 이전에 부부 싸움을 하면 절박하거나 애절한 마음이 들곤 했는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싸늘하고 메마른 감정이 들뿐이었다. 전혀 다른 나의 반응 때문인지 싸움은 말을 안 하는 단계로 돌입했다. 말을 안 한 지 하루 반이 지나고 저녁에 그가 집을 나갔다.
그가 집을 나갔다.
그전과 달리 그가 집을 나갔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후련하고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집을 나간 그가 고맙게 느껴졌다. 답답했던 공기가 그가 집을 나가면서 오히려 숨 쉬는 게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집을 나가는 찰나에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그가 완전히 집 밖으로 나간 것이 확인되자 내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모든 문을 잠갔다. 걸쇠까지 걸었다. 그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서 집에 들어오려고 하더라고 그를 집에 들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몇 년 동안 그는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집을 나갔다. 그가 마지막 집을 나간 날 나는 처음으로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