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감, 미안함, 후련함. 감정마다 각각 품고 있는 향이 다른 건일까? 나비가 꽃을 찾아 날아가듯 감정의 향기에 이끌려 마음이 머물렀다가 다시 다른 감정으로 이동해 머물렀다.
아기가 나에게 왔다가 생명을 움트지 못한 채 미지의 세계로 돌아간 상실감. 부족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왔기에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 불안한 가정, 무겁고 버거운 심리상태였기에 파도가 넘실대는 나의 배에서 내려 오히려 안전하게 돌아간 게 아닐까라는 자기 위안에서 오는 후련함.
슬퍼하고 아파하고 미안해야만 할 감정에 후련함이란 고춧가루와 같은 마음이 더해진 걸 느끼며 한없이 죄스러운 마음이 커졌다.
유산.
새로운 생명이 내 몸을 빌어 세상에 나오려다 안타깝게 빛도 보지 못했다. 없어야 하는, 없어도 되는 마음이 머물면서 감정이 요동쳤다.
음식을 할 때 고춧가루는 없어도 음식의 맛은 이미 완성된다. 이미 완성된 음식에 고춧가루를 넣으면 그 맛이 이전 맛과는 탈바꿈하듯 달라진다. 단순하게 매운맛만 있는 게 아니라서 넣는 양에 따라 맛이 확연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깔끔해지기도 하고 상쾌해지기도 하고 적당하게 얼큰하고 칼칼해지기도 하고 많이 넣으면 통증이 유발될 만큼 매워지기도 한다. 이미 완성된 요리로 충분히 조화를 이뤘는데 고춧가루의 첨가로 맛은 다른 영역으로 이동한다.
나의 심정도 그랬다. 하등 필요 없는 고춧가루와 같은 마음이 나를 다른 영역으로 데려갔다. 지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대면하니 밉고 추한 마음으로부터 최대한 내달려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집오리에 불과했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우리에 갇혀 사는 집오리처럼 마당 안에 갇혀 한 발짝도 더 나갈 수 없었다.
수술이 필요했다. 하혈을 하며 유산을 했을 때 반드시 산부인과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 산부인과에 가서 수술대에 누웠다. 끔찍하게도 하기 싫은 자세를 취한다. 무릎을 세워서 다리를 벌리고 의사의 지시를 기다린다. 주사를 놓는 차가운 손길이 느껴지고 주사기 바늘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들면서 서서히 의식이 흩어지고 이내 잠이 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나고 병원 비좁은 간이침대에 여전히 누워있다. 옷을 추스르고 의사 선생님께 잠시 설명을 듣는다. 의사 선생님의 말소리가 진공상태에서 흩어지듯 나에게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수납을 하고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서 착실하게 약을 챙긴다.
사무실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것처럼 지치고 발걸음이 무겁다. 회사에 전화해서 하루 병가를 내고 집으로 들어왔다. 끼니때가 되니 밥을 먹고 약을 손에 들고 있다가 한동안 멈춰있었다. '나를 보호하는 약을 먹으려 하는구나!' 나란 사람이 역겹게 느껴졌다. 작디작은 생명을 잃어놓고 나는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 어딘가의 불편함이 작은 생명의 불 빚을 꺼트린 게 아닐까?' 살인에 공모한 죄인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약을 챙긴다. '나란 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 인 걸까?"
약을 그대로 내려놓고 그대로 잠을 잤다. 선잠인지 눈을 감고 자는 게 맞는데 의식이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눈만 뜨면 되는데 도저히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잠인지 아닌지 모르는 의식 속에 머물고 헤매다가 새벽이 오고 아침이 됐다. 새벽이 오는 냄새와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지 않고 고집스럽게 누워 있었다. 알람 소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알람 소리에 기계적으로 일어났다.
회사에는 임신과 유산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하루만 병가를 냈다. 아침에 준비를 하고 출근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온종일 기운이 없는 나를 직장동료분들이 걱정하는 말을 건넸다. 야근을 하고 사무실에서 나가는데 회사 분들 몇 분이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좀 있으면 남편이 온수역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돌아섰다. 그런데 워낙 내 얼굴이 안 좋다며 동료분들이 밥 먹고 가라고 잡았다. 온수역 근처 식당으로 왔다. 역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고기를 시켰다. 한 점이라도 먹고 가라고 잠시 앉아 있게 했다. 고기가 구워지는 사이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온수역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고기 한점 먹지 못하고 남편이 먼저 도착한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음식점 쪽에서 걸어오는 나를 보며 남편이 예민하게 화를 냈다.
지치고 힘들어서 싸움조차 하기 싫은데 거칠게 말하는 그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왜 화를 내냐고 묻자 거기에 뭐 하러 앉아있었냐고 트집을 잡는다. 설명하기도 귀찮고 모든 것이 지치고 힘들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물었다. "너 자체가 잘못이야, 거기 그곳에 앉은 것부터가 큰 죄야~" 그가 하는 말이 무기가 되어 공격했다.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이 몸속에 푹푹 박히는 것 같았다. 이미 내상을 입어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수차례 확인사살하듯 그의 말이 끊임없이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