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훈육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2023년, 대한민국 대부분의 가정집에서회초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학교 선생님들 손에 당연한 듯 쥐어졌던 제각각의 <사랑의 매>가 전부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학교에서 훈육을 목적으로 회초리를 들 수 없다. 개인의 손에 자유롭게 허락된 실시간 CCTV는 지키는 도구에서 공격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무너진 교권, 몇몇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죽음. 사회문제로 그 심각성과 해결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다. 이 같은 시기도 그저 과도기이기를 바라본다.
불과 20년 전에 집에서, 학교에서 일상이었던 일들이 파렴치한으로 치부받는다. 폭력이 아닌 최선의 훈육에 대한 분명한 잣대가 필요하다.
77년생인 내가 어린 시절 학생일 때는 선생님이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집에서도 잘못하면(?) 부모님께 맞는 게 일상이었다. 학교에서 자신의 자녀가 잘못하면 부모님들이 선생님께 때려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 전국 어디든 학교에서 훈육의 현장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윗세대 언니 오빠들도 맞았고, 후배들도 맞았다. 잘못한 게 있으면 손바닥이든 발바닥이든 엉덩이든 때리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선호도에 따라 부위가 결정됐다. 물론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는 것 같은 따귀를 때리거나 손이나 주먹으로 때리는 선생님을 본 적도 있다. 학교에서 폭력인지 훈육인지 모르겠는 사고가 왕왕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선생님의 훈육으로 부모님이 학교에 오는 일은 없었다.
불과 십여 년이 지난 후에 학교에서는 폭력과 훈육이 모두 사라졌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으니 사회가 좋아지는 긍정적인 요소다. 그러나 문제는 최소한의 훈육 또한 사라졌다는 점이다. 치우치면 어떤 것에 든 문제가 생긴다. 수평을 맞춰가려면 진동을 하고 그 진동은 이전에 기울어진 기울기가 강할수록 반대적인 기울기도 강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나날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까? 급격한 사회 변화를 받아들이며 균형을 잡다 보니 어느 곳이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남녀평등, 직장 내 성희롱, 미투, 일베, 패미 등 극단적인 성향을 상쇄시키기 위해 극적인 일들이 발생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있었던 말들 중에 가정 내 위계질서는 구시대 유물이 되었다. 우리 집만 해도 남자와 여자가 밥상을 따로 놓고 밥을 먹었던 때가 있다. 이후 한상에 먹게 됐지만 아버지용 반찬을 별도로 마련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는 아이용 반찬을 따로 만들어 주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어른중심의 가정에서 아이중심의 가정으로 바뀌었다. 대접받는 아이들, 자신이 집안에 중심으로 존중받고 자란 아이들이 성장해서 사회로 나오고 있다. 그 세대의 발전이 MZ 세대인지도 모르겠다.
23년 9월 9일, 큰언니 아들이 결혼식을 했다. 가족, 어른부터 조카들도 모두 결혼식장에 참석했다. 큰언니의 자녀는 둘이고 첫째가 아들인데 동생이 먼저 시집을 가고 지난 9월 결혼식을 했다. 큰언니의 둘째가 딸인데 몇 년 전 결혼해서 자녀 두 명의 아이까지 낳았다. 큰언니는 이미 할머니가 됐고, 둘째 손자는 얼마 전 돌잔치를 했다. 장 씨 집안의 장남인 오빠도 아들딸이 있고, 작은언니도 아들딸이 있다. 나만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자녀가 한 명이다. 가족들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 모였다. 가족만 모였을 뿐인데 한자리를 채웠다. 조카들과 아들을 보니 그 시작이 엄마 한 분으로 시작됐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 우리 모두의 뿌리로 엄마만 우리와 함께했다. 엄마 한 분의 존재가 산처럼 느껴졌다.
2007년에 우리는 일곱 식구가 같이 살았다. 엄마는 오빠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맡아서 키웠다. 오빠의 자녀는 아들은 외모가 친탁해서 자신의 아빠를 닮았고, 딸은 외탁해서 엄마를 닮았다. 물론 조카 둘은 형제자매니 서로 ai프로필 남녀 버전처럼 닮았다. 오빠가 이혼하고 처음엔 새언니가 아이들을 키우겠다고 했다. 양육한다는 명목하에 새언니가 돈을 요구했었고 그 과정에 오빠는 직장을 잃었다. 엄마 입장에 미워하고 야속했던 고약한 며느리였을 것이다. 그런 며느리를 닮은 손녀딸. 엄마는 어린 손녀를 맡아서 키웠다. 손녀를 돌보며얼마나 복잡한 마음이었을지 가늠할 수 없다.
손녀를 아껴주면서도 가끔 증오하듯, 미워하는 내색을 하곤 했다. 할머니와 어린 손녀딸은 그들만의 관계를 쌓아갔다. 손녀딸은 어린 시절 정서적인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인데도 가끔 오줌을 쌌다. 그리고 도벽도 있었다. 그런 손녀딸을 훈육(?) 하는 과정에서 엄마는 매를 들었다. 어떤 마음으로 매를 들었을지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엄마가 손녀딸을 과도하게 때릴 때면 작은언니와 나는 초긴장이 되곤 했다. 엄마를 말리고 우리가 방패막이가 되어주겠다고 나섰다가 엄마와 우리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엄마는 손자들이 잘못하면 자주 매를 들었다. 그러나 나의 아들은 열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혼내도 내가 혼낸다고 당부한 것도 있었고, 엄마 입장에서 딸의 자식은 조금 더 어려웠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 일곱 식구가 함께 살면서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날엔 늘 엄마가 아이들을 혼내는 일이 포함되곤 했다. 그런 일 말고는 크게 부딪힐 일은 없었다. 아이들끼리 싸우는 일이 있거나 말썽이 일어나면 유독 손녀딸이 많이 혼났다. 어릴 때 혼내기만 하고 손녀가 할머니에 대한 애정을 전혀 못 느꼈다면 지금 엄마와 손녀딸의 사이가 망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엄마와 손녀딸 사이에는 정을 쌓는 일들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결혼식날 손녀딸이 오랜만에 지방에서 올라왔다.할머니가 양산을 갖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양산을 선물로 사 왔다. 16년이 지난 지금은 아이들이 다 커서 성인이 되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글을 쓸 때 아팠던 기억들이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우리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그렇기에 엄마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커져간다. 엄마의 손자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에 꽃을 피우고 있다. 결혼식날 조카들 모두 밝고 건강한 모습이라서 감사함에 기도를 드렸다. 깊게 파인 주름과 머리숱이 현저하게 적어진 엄마를 봤다. 거칠어진 엄마손에 눈길이 멈췄다. 엄마에게 음식을 가져다 드렸다. 음식을 드시는 엄마를 보며 눈을 감고 기도드렸다. "엄마가 우리 곁에 오래 있게 해 주세요."
과거가 된 일들이 감사하다. 2023년의 감사와 2007년의 안타까움이 공존한다. 2007년, 엄마는 손녀를 혼낼 때 심하게 때리는 할머니였다.
한 줄 요약: 아이들을 때렸던 엄마는 손자들과 사이가 좋아졌다. 사랑(?), 정이 쌓였다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