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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Dec 18. 2023

4) 아버지와 엄마

흑수저에게 돈의 의미

4) 아버지와 엄마


흑수저는 가난한 가정의 자녀를 일컫는 말이다. 1977년 생인 나는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가 대물림되는 건 맞지만 옛말에 부자가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다는데 그게 우리 집안을 두고 하는 소리 같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부모로 인해 흑수저로 살았다. 부모가 돈이 있는 걸 본 적이 없고 집에 쌀걱정 돈걱정을 하던 기억이 많다. 아버지는 빚을 남겨주고 빚이 단순상속되는 1997년도에 돌아가셨고 우리 가족들은 법에 대해 무지해서 빌라집을 상속받으며 재산보다 더 많은 빚을 함께 상속받았다. 엄마는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 많은 빚을 갚게 했고 자신의 노후를 자식들에게 의탁하고 노년이 되었다.


반전이다. 우리 부와 모는 모두 가난한집안 출신이 아니다. 고로 부모세대에 이르러 자식들을 흑수저로 만들었다. 조부는 고조부의 땅을 물려받아서 땅이 많았고 동내 유지였다. 조부는 아들 둘을 두었고 호적은 한 명의 아들만 올렸다. 전쟁터에 끌려가면 아들 둘 다 죽을 수도 있으니 그 시절에 평범하게 많이 하던 대로 꼼수를 쓴 모양이다. 종갓집인 우리 집은 손이 귀한 집안이다. 물론 그 손이라 함은 아들에 한정한다. 딸은 출가외인으로 사람으로 치지 않는 시대였다.  

모의 집도 중산층으로 형제자매들이 여덟이나 되고  어린 시절 배곯은 적 없이 살았다. 그러나 남아 선호사상이 강한 모의 집안은 딸에게는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조부는 얼짱이었고 부자였기에 첩을 셋 이상 거느렸다. 어수선한 세상이었기에 첩들은 조부의 그늘에서 생계를 유지했다. 자손은 조강지처에게만 두어서 가족관계가 얽히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어릴 때 모두 병으로 돌아가셨다. 종갓집 외동아들이 된 아버지는 젊은 시절 유랑하듯 살았다.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기에 풍운아로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게 됐다. 그녀 납치해 왔다. 어르고 달래서 아내로 삼았다.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대로 살림을 차렸다. 납치해 온 여인이 나의 엄마고 납치한 양반이 나의 아버지다. 당시만 해도 신식문물인 신식결혼식을 하며 둘은 부부가 되었다. 며느리인 엄마가 볼 때도 시아버지는 인자하고 잘생기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며느리를 구박했다.


조부에겐 첩이 줄줄이 있었으니 조모의 마음이 편할리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결혼을 했으니 며느리가 예쁠 리 있겠는가? 게다가 며느리는 손이 귀한 집에 아들을 낳아주지 않고 첫 자손으로 딸을 낳았다. 구박은 날로 심해졌고 며느리인 엄마도 성질이 만만치는 않아서 시어머니와 대거리하며 대들고 싸웠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마실을 나갔다가 넘어지며 곰방대가 목을 뚫는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나마 자신을 아끼던 시아버지가 죽자 며느리는 사는 게 더욱 고달팠다.


딸, 아들, 딸을 둔 엄마는 막내가 아들이라는 의사의 확신에 나를 낳았다. 그러나 막상 낳고 보니 딸이라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진의 결과로 나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흑수저라고 불평할 핑곗거리가 없다. 의술이 조금만 좋았어도 세상빛도 못 보고 죽을 수도 있었던 운명이었는데 흑수저가 대수일리 없다. 자식넷을 낳고 사는데 남편은 한량에 놀음을 일삼았다. 싸우고 화를 내도 답이 안 나오자 자식들을 떼어놓고 집을 나갔다. 막내딸인 내가 젖먹이 어린아이 일 때 일이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엄마는 여동생의 설득과 자식들이 눈에 밟혀 집으로 갔다. 막내가 젖을 못 먹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엄마가 집에 다시 들어와서 어린 나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죽음의 두 번째 고비가 내가 기억하기 전에 이미 지나갔다.


시어머님도 죽자 시댁의 고장 양주, 그곳을 떠나기로 엄마는 결심했다. 그리고 가진 것 없이 도심으로 왔다. 엄마의 형제자매들이 부천에 터를 잡고 있어서 부천으로 봇짐을 들고 이사했다.


어린 시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직업은 청소조장님이었다. 이전에는 거리에서 청소일부터 시작했다고 들었다. 도둑을 잡으며 대통령표창을 받고 승진하셨다고 한다. 조장에서 반장 그리고 감독으로 일하셨다. 이후 병을 얻어 쉬게 되셨고 투병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던 어린 시절에 나는 가난하다는 인식은 없었다. 주변사람들도 비슷한 환경이었고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우리 집은 가난의 늪에 빠져들어갔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일 때 몇 년 동안 신병을 앓다가 끝내 집에 신당을 차렸다. 몇 년 동안 병원을 다녀도 모두 가망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죽으면 죽었지 무당은 못하겠다고 신을 거부하자 다른 가족들까지 아프고 사고가 생겼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울부짖던 엄마가 들은 말은 더욱 처참했다. "사고로 그칠 줄 알아? 결국 니가 거부하면 니 자식한테 가게 돼있어!" 엄마가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자식에게 그 명맥이 이어진다는 말은 청천벽력이었고 엄마의 마음을 철저히 무너트렸다. 죽고 싶었지만 살아내야 했다. 그 끈질긴 인연을 끊기 위해 엄마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들이 말하는 무당, 보살이 된 엄마. 사춘기 학생이 된 나는 엄마가 부끄러웠다. 안 그래도 좁은 집안에 신당이 있는 게 싫었다. 친척들과 외부인들이 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학교나 또래 아이들이 우리 집 형편을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집에 친구들이 오는 건 극도로 무서웠다. 그러나 엄마가 보살이 된 후 집에 쌀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가 투병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건 무당이 된 엄마였다. 나는 방한칸에 차려진 신당 덕분에 배 곯지 않고 사춘기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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