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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Dec 21. 2023

6) 반석차 31등이라니

흑수저에게 돈의 의미

6) 반석차 31등이라니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는 S여고였다. 부천에서 두 번째로 성적이 좋은 학교였다. 첫 번째로 좋은 곳은 성적이 커트라인에 걸려서 망설여졌다. 혹여 떨어지기라도 하면 미달인 학교로 가야 했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1위인 학교를 갈 것인지 꼴찌인 학교를 갈 것인지 판가름 나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안정적으로 2위인 학교에 지망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계속 차일피일 학부모면담을 미루고 학교에 오지 않았다. 재차 엄마에게 말해야 했다. "엄마 학교에 이번주까지는 꼭 와야 한데, 안정권은 S여고야. 선생님 상담할 때 그 학교로 한다는 말만 해주면 돼"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여자선생님이었다. 단발머리에 파마끼가 있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로 귀여운 인상을 가진 선생님. 당시만 해도 선생님들에게 촌지, 선물이 성황일 때라 엄마는 학교에 오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소풍이나 학교행사에 엄마의 존재는 늘 부재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부모들 중 성인 부모는 소풍 때 선생님들 도시락을 학부모님들이 손수 챙겼다. 중학교 3년 동안 부모님과 학교선생님은 한 번도 접점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번, 진학상담은 학부모상담이 필수였다.


중학교 1학년때 총원 52명 중 31등으로 첫 성적표를 받았다. 1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친 후였다. 반석차 전체등수가 나열된 종이 한 장은 압정에 꼽혀 교실 뒤쪽 초록색 게시판 우측 하단에 단단하게 고정돼 있었다. 효수한 머리처럼 전시된 성적표. 당시 그 등수를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31등? 총원이 52명인데? '이상하다. 꼴찌무리에 속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일이지?'


국민학교 때의 기억은 암담하다. 그야말로 인생전반으로 봐도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숙제를 안 해가서 혼나고 준비물을 안 해가서 혼나는 게 일상이었다. 엄마는 불면증이 있었고 학교준비물을 신경 써주지 않았다. 학교는 늘 선생님들에게 혼나고 꾸중을 듣는 곳이었다. 미취학아동에 초콜릿을 치던 새끼도둑국민학생이 되자 더욱 발달된 어린이도둑이 되었다. 국민학교 가자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졌다. 문방구에 가면 그곳엔 한 맺힌 준비물이 가득했다. 준비물뿐 아니라 학용품과 불량식품, 장난감등 그곳은 신비한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 알록달록한 별천지 세상이 있었다. 준비물 때문에 매번 혼나고 구박받던 나에게 문방구는 파라다이스였다. 준비물을 훔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부분 부피가 커서 어린이가 훔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은 그야말로 환상의장소, 만만한 물건이 레이더에 포착됐다. 국민학교 저학년생 아이의 작은 손에도 간단하게 한 손에 들어가는 물건들. 지우개 샤프심은 타깃이 되기 좋은 최고의 물품이었다. 그것들을 자주 훔쳤다.


동네 구멍가게 도둑은 문방구로 확산됐고 다시 그 공간이 넓어졌다. 어느 날부터 학교에서도 도둑질을 했다. 당연하게도 친구들에게 의심을 샀다. 그때 느낀 감정은 무척이나 난감했다. 참을 수 없는 수치심. 그 무섭고도 부끄러운 감정은 가슴속 깊이 죄의식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느낀 거대한 수치심은 일순간 도둑질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러나 학교에 가기 싫은 마음은 더욱 커졌다. 나의 수치심을 알고 있는 시선으로부터 영원히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다. 학교 가는 길은 어린이 걸음으로 40분이 넘게 걸렸다. 세 살 터울인 작은언니와 학교에 같이 다녔다. 엄마에겐 앙탈도 할 수 없으니 학교 가는 길에 길바닥에 앉아서 울었다. 미친 듯이 우는 나를 보며 작은언니도 같이 울었다. 그러다 학교에 빠지기 시작했다. 2, 3학년 2년 동안 학교에 걸핏하면 빠졌고 유급될뻔했으나 간신히 학년이 올라갔다.


국민학교 4학년이 되자 작은언니는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혼자 학교에 다녔고 더욱 조용하고 음침한 학생이 되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집에서 가까운 국민학교가 생겼다. 그러나 주변사람 중 나만 학교에 편입이 안되고 누락됐다. 이유는 잘 모른다. 아마도 부모님이 신청을 해야 했을 수도 있다. 누락생은 나 한 명이 다였고 결국 5학년때 전학을 왔다. 그리고 5.6학년은 이전 학교에서보다는 말이 많아졌다. 그러나 기를 못쓰는 건 여전했다. 공부도 못했고 지저분했고 쪽지시험을 보면 발바닥을 많이 맞았다. 친구도 없이 혼자 조용하게 지냈다. 이십 대가 됐을 때 아일러브스쿨에서 국민학교 동창들이 모인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중학교는 집에서 다소 거리가 먼 곳에 배정됐다. 같은 국민학교출신이 극히 적었다.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다짐을 나았다. 중학생이 되니 스스로 챙길 수 있는 것도 많아졌다. 그러다 처음 받은 성적표 반석차 31등. 한참 게시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들었던 수많은 생각들. 이게 무슨 일이지? 31등이면 너무 높은데? 우수한 성적에 우쭐해졌다. 더욱이 32등은 같은 국민학교출신의 경a다. 경a는 피아노를 잘 치고 공부도 잘하고 얼굴까지 예쁜 아이였다. 내가 쭈구리라면 경a는 공주였다. 그런데 경a보다 무려 한 등수가 높다니? 무참히 수면아래 꺼져있던 자존감이 31등 석차로 수면 위에 올랐다.


올라온 자존감 덕분에 공부에 열성을 다했다. 친구들도 서서히 바뀌었다. 1학년 2학기에 20등 로 올라오고 2학년에 15등 정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3학년이 되자 10등 이내로 올라왔다. 3학년 2학기초에는 성정이 더 올랐고 반석차 7등 이내였다. 우리 반 아이들은 전교석차가 높은 편이라서 반석차에 비해 전교석차가 높았다. 문제집을 풀 때는 반드시 연습장에 풀었다. 한 개의 문제집으로 반복해서 공부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학교선생님들께 쉬는 시간이나 자율학습시간에 물어봤다. 공부 잘하는 친구를 따라 하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첫 성적표 31등의 성적표는 2년 후 반석차 5등이라는 기적을 만들었다.


"장ㅇㅇ,  너 여상 가니? 원서 쓰고 가셨어!" 카랑카랑한 담임선생님의 음성이 귀에 닿았다. 소리를 들은 기관은 귀인데 통증은 머리와 가슴에 전달됐다. 이해되지 않는 말은 그야말로 천청벽력이었다. 선생님께 다시 가서 물었다. "엄마가 오셨어요" "아니, 할아버지가 오셔서 말씀하시고 가셨어." 정전.


집에 가서 확인하니 외할아버지를 학교로 보냈다는 엄마. 어떻게?라는 말이 나오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 가슴이 울렁거렸다. 반항한마디 할 수 없는 가정환경, 그저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학교를 가도 집을 가도 눈물이 수시로 나왔다. 3일을 내리 울기만 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부모를 원망하는 건 폐륜이라는 생각에 원망의 마음도 드러내지 못했다. 꽁꽁 감춰둔 생각은 순간 죽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진 않았다. '그래, 상고에 가더라도 대학의 문이 완전히 닫히지는 않으니까, 공부하자.' 희망의 꽃씨는 뿌리를 내릴 흙을 찾지 못하고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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