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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Dec 23. 2023

7) 밥 한 숟가락

흑수저에게 돈의 의미

7) 밥 한 숟가락


민들레홀씨되어 날아가는 생의 여정은 졸업과 입학을 품고 있었다. 미래의 비상을 꿈꾸던 중학생은 부러진 날개를 방치한 채 졸업했다. 겨울방학은 길었지만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큰언니가, 오빠가 작은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방학의 시간에 형제자매가 만든 길을 따라갔다. 봄방학까지 이어진 휴식의 시간은 쉬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돈의 수요를 채웠다. 여타 상업고등학교에 배정된 친구들은 주산부기타자등 학원에 다니는듯했다. 나는 달콤한 방학기간에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 무언가를 만드는 장소. 그 시절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하대해서 칭하는 말이 공수니, 공도리였다. 내가 일한 공장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시계를 만드는 곳이었다. 내가 맡은 일은 도금한 시계부품들을 포장하는 일이었다. 단순작업이었지만 불량이 나면 안 돼서 신경 써야 하는 점들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패스푸드점이나 주유소, 커피숍을 찾지 않고 공장을 간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방학 때라서 학생들이 많이 가는 아르바이트 자리는 귀했다. 또한 공장아르바이트는 여타 알바보다 임금이 좋았다. 그곳의 경험은 재미있고 심지어 즐거웠다. 특히 야근을 하면 밥을 주었는데 중식을 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짜장면이나 짬뽕 혹은 볶음밥을 먹었다. 초등학생 때만 해도 특별한 날이나 외식 때나 먹는 귀한 몸이 바로 짜장면이었다. 야근이 매일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개학을 앞두고 입학준비를 했다. 필요한 준비물들을 구매하고 교과서를 받았다. 중학생때와는 결이 다른 교과목들이 신기했다. 주산, 부기, 타자, 과목별로 필요한 준비물이 다르고 많기도 했다. 나는 정보처리학과라서 컴퓨터 관련과목도 있고 난생처음 배워야 하는 것이 많았다. 교복이 네 벌이나 생겼다. 3년 동안 소임을 다한 작은언니의 동복, 하복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사촌언니도 같은 상고를 졸업해서 4년 묵은 교복도 물려받았다. 각각 3년, 4년이 지난 교복은 후줄근해 보였다. 그리고 사람마다 미묘하게 다른 체형 때문인지 교복을 입었을 때 옷테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 교복을 사달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필요한 게 많은데 교복은 무려 남들에 비해 두 배가 생겼으니 타박할 거리가 되지 못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작은언니는 취업을 해서 집을 떠났다. 큰언니도, 오빠도 일을 하게 되면서 안산에서 일하며 기숙사생활을 했다. 작은언니는 회사가 수원이라서 기숙사로 떠났다. 주말에 한 번씩 오던 작은언니는 차츰 집에 오는 게 뜸해졌다. 한 달에 한번, 두 달에 한번 정도로 집에 왔고 올 때마다 맛있는 걸 사줬다. 작은언니가 회사를 다니게 되고 내가 작은언니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작은언니와 친밀해졌다. 작은언니가 기숙사로 떠나자 처음으로 나에게 방이 생겼다.


바깥양반의 대표주자인 아버지가 바깥출입이 줄어들게 되었다. 안방에는 아버지의 침대가 마련됐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아프셨다. 고등학생이 되고 얼마 후 일을 그만두셨다. 병원은 상태가 심각해질 때 119를 불러 향하는 돈먹개비였다. 이후 안방은 아버지의 병실이 되었다. 입원이 필요했지만 형편이 쫓아가지 못했다. 상태가 심해졌을 때만 병원에 가서 임시방편으로 치료를 받았다. 병증은 나아지지 않았고 만성적인 병이 되었다. 합병증으로 다른 곳에도 이상이 생겼다. 아버지는 병환이 심각해지면서 점차 바깥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버지는 참 멋졌다. 부천시에서 유일한 총감독이셨던 아버지. 할리데이비슨처럼 멋있는 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얼굴도 잘생기셨고 키도 컸다. 유머감각도 있고 인자하셨다. 엄마를 아꼈고 귀하게 여겼다. 아버지 생신 때는 아버지 산하의 직원분들 300명 이상이 축하객으로 집에 와서 식사를 했다. 아침, 점심, 저녁까지 축하객이 이어졌고 그야말로 동네 잔칫상이 펴졌다. 집이 좁아서 마당에 상이 차려졌고 돼지 한 마리를 잡고 기름냄새가 퍼졌다.  술은 안 드셨고 담배를 멋들어지게 피우셨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풍류를 아셨다. 새벽 3시 전에 일하러 나가셨다가 이른 시간인 오후 5시 전에 들어오셨다. 반찬투정하는 걸 본 적이 없고 밤 10시에는 잠을 주무셨다. 사냥, 낚시 등 취미생활도 즐기셨다. 낚시는 강태공 못지않게 좋아하셨고 붕어 잉어 향어등 민물과 바다낚시 모두 잘하셨다. 꿩사냥 토끼사냥을 하셨고 사냥총도 소지하고 계셨다.


상업고등학교의 친구들은 모두 이상했다. 대학과 상관없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성적이 안 좋은 아이들이 모인 집합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 가장 놀란 것은 성적표를 봤을 때다. 나는 나 같이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상고에 올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오만했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전교 1등이라도 될 줄 알았다. 1학년때 우연히 학교아이들 성적을 보게 됐다. 고등학교에 오기 위해 입시를 봤다. 우연히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다가 전교석차가 나와있는 서류를 보게 됐다. 그런데 내가 최상위권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의외로 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상고에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왜 상고에 왔는지 궁금해졌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아이들이 모였다는 걸 학교생활을 하면서 알게 됐다.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점심밥을 함께 먹는 친구들이 순식간에 늘었다. 밥멤버가 훌쩍 열명이 넘게 됐다. 엄마는 아빠가 아프자 음식과 살림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교복을 빨고 준비물을 챙길 수 있는 나이가 된 건 다행이었다. 그러나 도시락 반찬을 싸고 밥을 싸는 건 아주 성가신 일이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김치 반찬이라도 도시락을 싸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매일 김치만 싸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반찬을 만들 줄 알았던 것도 아니다. 밥을 못싸간 첫날 아쉬운 대로 학교 매점에서 사발면을 사 왔다.


그 후 도시락을 준비해 가지 못하는 날은 사발면을 사 오게 됐다. 그러자 친구 한두 명이 도시락 밥을 나누어주었다. 밥대신 먹던 사발면이 질릴 때라서 사발면은 친구가 먹었다. 그 후 밥을 나눠주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내가 직접 도시락을 싸야 한다는 걸 알게 된 친구들은 매일 밥 한 숟가락의 정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사발면을 사 오고 함께 점심을 먹는 친구들이 밥 한 숟가락씩을 덜어주었다. 사발면은 친구들의 몫이 되었다. 천덕꾸러기 사발면은 국물까지 밥을 말아먹고 깨끗하게 해치워졌다. 당시 나는 냄새만 맡아도 신물이 나는 사발면을 멀찌감치 치워놓을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도시락멤버 친구들은 거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반이 달라져도 우리는 한 곳으로 모였고 다 같이 밥을 먹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아이들은 나에게 밥 한 숟가락씩을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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