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대학원서

셸 위 댄스 -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32화.




봉숭아꽃(꽃말:매력, 유혹, 용서, 희망)



대학원서


회사를 안양으로 발령받은 상태에서 대학교를 간다는 건 허황된 바람이었다. 그러나 입문교육을 받으며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면서 애사심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우리 회사는 인재를 중시하고 사원의 개인적 역량을 적극적으로 키워주는 최고의 회사였다. 본사에서는 7시에 출근해서 4시 퇴근하는 7ㅡ4제를 실행하며 직원들에게 자기 계발을 강조했다. 직장인이 돼야 한다는 마음에 서럽게 포기했던 대학교였지만 회사 방침에 기대어 다시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바라 마지 하던 대학생이 된다는 생각에 신바람이 나서 학교를 물색했다. 우선 '학과'는 중어중문과 이길 바랬다. 새내기 직장인이 4년제를 다니기엔 무리일 것 같아 전문대를 골랐다.


안양에는 전문대가 딱 한 곳 있었다. 그런데 안양에 있는 학교에는 중국어 관련 학과가 없었다. 외국어라고는 유일하게 영어영문뿐이 없다. 중국어과 자체가 전문대에는 많지 않았다. 겨우 찾은 곳이 B 여자 전문대에 중어중문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안양과 거리가 먼 서울이었다. 아쉬운 대로 두 곳에 원서를 넣었다. 원서 값도 만만치 않아서 새삼 놀랐다. '돈 없이 되는 일이 없네'라며 불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배부른 투정이다 싶어 감사함을 되새겼다. 대학교에 야간반 원서를 내고 며칠을 기다렸다. 회사에 적응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사이 서류에 합격되고 면접까지 봤다. 결과는 다행히 두 곳 다 합격이었다. 꿈이 곧 이루어질 것 같은 부푼 마음에 세상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도 힘이 났다.


두 곳 중에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을 심도 있게 할 때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선택권은 나에게 없었다. 회사에서 일을 끝내고 B 여전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학과가 아쉽지만 등교가 가능한 학교로 갈 수밖에는 없었다. 통역이나 번역을 하며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는 꿈이 한 발짝 다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다소 멀리 돌아가더라도 대학에서 배우고 즐길 수 있다는 마음에 스스로를 위로했다. 부모님께 가는 길은 가볍기도 하고 한편 무겁기도 했다. 대학을 가고 싶었던 딸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냈다. 그게 부모를 향한 도전이 아님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여러 가지 어수선한 마음으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내 손에는 전리품인지, 반성문인지 구분할 수 없는 합격 통보서가 들려있었다.


부모님은 합격 통보서를 보고 등록금을 걱정하셨다. 부모님께서 등록금을 해결해 주실 거란 기대는 없었다. 직장인이니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요즘처럼 정보를 찾는 것에도 제약이 있었고 학자금 대출 같은 제도가 없을 때였다. 장학금을 받는 것도 아니고 고스란히 입학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때 돈으로 25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금액이었다. 큰돈이었기에 어떻게 마련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회사나 선배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우선 부모님과 상의했다.


부모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며칠 후 엄마가 이내 돈을 마련해 오셨다. 방법을 찾아주십사 상의드린 것이 아닌데 등록금을 마련하신 것이다. 감격스럽고 고마운 마음이 커졌다. 다음 달부터 나눠 내면 된다고 했고 월급으로 충분히 낼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결국 직장을 다니게 된 것이 꿈을 꺾는 일이 아니라 꿈을 잇는 일 같아 회사에도 감사함이 커졌다. 그 돈을 받아 들고 신나는 마음으로 대학교로 갔다. 대학교는 생각보다 더 괜찮아 보였다. 수납처에 당당하게 입학금을 냈다. 야간은 한 반이고 주간은 반이 여러 개인듯했다. 학교를 보니 대학생이 된다는 게 좀 더 실감이 됐다.


연말이 되고 회사도, 거리도 연말 분위기로 가득 찼다. 나는 어엿한 직장인이고, 더불어 대학생이 될 터였다. 처음 맞는 직장인으로서의 연말은 '바쁨' 그 자체였다. 새롭게 바뀌는 정책과 인사이동도 있었고 숨 가쁜 변화에 발맞춰 적응해 나가야 했다. 소영이와 나 말고도 12월엔 동기들이 10명 정도 더 늘었다. 회사 자체적으로 여직원 인원을 충원하며 우리 동기생들이 늘었다. 어쩜 그렇게 다들 예쁜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동기들이 많아서 서로에게 자극도 됐다. 회사 내에 아직 남아있었던 몇몇 비정규직 선배 여직원들은 해고될 예정이었다. 회사는 커지고 성장하고 직원들의 복지를 키우는 호시기를 맞는 시기였다.


처음으로 회사에서 송년회라는 것도 했다. 지점에 계신 지점장님과 과장님들은 술자리에서도 매너가 좋으셨다. 여직원들을 위해 하는 회식처럼 어린 우리들을 위해 배려해 줬다. 지점 언니들은 얼마나 잘 놀던지 일할 때와는 딴판으로 놀았다. 일할 땐 엄하고 무섭던 언니들이 술은 어찌나 잘 마시던지 극과 극을 보는 것 같았다. 송년회는 맛있고 신나고 요란했다. 스트레스에 지친 여직원들이 포효하며 그 시간은 광란의 밤이 되었다. 우리 동기들은 아직 고등학교 졸업 전이라 음료수에 취한 듯 밤을 불태웠다. 안양 1번가의 화려함을 송년회 때 경험했다. 고등학교 친구인 '심'도 회사 생활 적응에 여념이 없었다. 연말연시에 남자친구도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두 달 가까이 손수 짰던 목도리를 선물로 주니 감격하며 좋아했다.


1996년, 1월

20살이 되었다.


제대로 된 20살을 즐길 일이 내 앞에 펼쳐졌다. 첫 발령이 났다. 지점, 영업소, 보상과 등 여러 곳 중 영업소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영업소장이 여자분이셨다. 그것도 설계사 출신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풀뿌리 근성이 있는 분이셨다. 아무래도 나이 많은 여자분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서 왠지 속상했다. 영업소로 발령받으면 소장님과 총무 둘만 있게 된다. 모든 지점이 다 남자 소장님이었고 여자 소장님은 그분이 유일했다. 나만 유일하게 소장님이 여자여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먼저 끄는 게 시급했다. 배울 일이 너무 많았다. 한 달 이내에 인수인계 후 그만둘 총무 언니에게 일 배우느라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1월 등록금을 엄마에게 어떻게 드리면 되는지 물어보니 30만 원씩 작은 언니에게 주면 된다고 했다. 금액이 커서 놀라서 엄마에게 물어봤다. 그제야 등록금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이른바 불법 카드깡!!!!! 직장을 다니던 작은언니 카드로 어마어마한 선취금과 이자가 청구된 것이다. 12개월을 30만 원씩 내야 하면 도대체 이자가 얼마야? 엄마도 대단했지만 카드사의 만행인지 카드깡의 폐해인지 구분이 안 됐다. 아~그때 그냥 나더러 해결하라고 했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않았을까?


엄마 대단해요~(유행어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