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을 하면서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오빠가 따로 살림집을 차려 나가서 살았기 때문에 방이 생기게 되었다. 작은방을 작은언니와 함께 사용했다. 작은언니는 주 중 낮에 회사를 다니고 저녁엔 알바를 다녔다. 치맥을 파는 곳이었는데 가족들 모두 같이 가서 먹곤 했다. 집에는 아픈 아빠가 계셨기 때문에 늘 집안 형편은 안 좋았다. 어떤 지출이 얼마 정도 나가는지 우리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벌어오는 돈의 대부분을 부모님께 드릴 뿐이었다. 큰언니는 결혼해서 바로 앞에 동 빌라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왕래했다. 오빠는 결혼을 해서 따로 살림을 살았기 때문에 가끔 집에 들렀다. 큰언니, 오빠가 결혼해서 각자 살림을 꾸려 나갔기 때문에 우리 집 생활비는 작은언니와 내 몫이 되었다.
2월 한 달 동안 좌충우돌 몸은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마음은 들쭉날쭉 널을 뛰었다. 출근과 동시에 일이 밀려왔고 6시가 지나면 또 다른 일들이 줄을 서고 있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나도 일이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졸속한 인수인계는 틈이 너무 많았고 하루하루가 배우는 시기였다. 닥치면 그때그때 한 가지씩 처리해 가며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시간을 보냈다. 지점 선배들에게 전화해서 묻기도 하고 고만고만한 동기들끼리 정보 공유를 하며 해결해 나가기도 했다. 마감이란 걸 처음 해봤고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영업조직에 속해 있으므로 매출을 챙기는 것도 중요했다. 매출과 상관없이 총무는 총무 나름대로 챙기고 단속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3월이 됐다. 겨우 한 달 마감해 본 걸로 일을 알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3월이라 개강시기가 되었다. 미리 지점장님께 말했지만 오후에 학교 수업을 가는데 여간 눈치가 보인 게 아니다. 미리 '여사님'들께도 말을 해놨다. 회사일도 나름 규칙을 정했다. 총무가 있는 시간에는 무작위로 서류를 냈기 때문에 나만의 규칙이 필요했다. 서류 마감을 최대 6시까지 정했고 빠르게 업무처리를 마무리해야 했다. 회사에서 칼퇴근해서 학교로 냅다 뛰어가도 수업 한 시간 가까이 지각이 될 터였다. 퇴근길을 출근길처럼 달리기 해서 미친 듯이 학교로 달려갔다. 내 의지나 계획과 상관없이 3월은 쏜 살같이 빠르게 지나는 하루하루였다.
다른 동기들 사정도 비슷했다. 10시까지 일하는 동기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마감 전 며칠은 12시 넘어서까지도 일을 했다. 거리가 먼 총무를 영업소 소장님이 집까지 바래다주는 곳도 있었다. 신입들이 일이 미숙해서 일이 늦게 끝났던 것만은 아니다. 영업 특성상 월말이 다가오면 밤늦게까지 일하는 게 일상이었다. 선배 언니들 사정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소장님은 나 같은 총무를 만나서 불만이 많았을듯하다. 어린 나는 남 생각 할 여유가 없었다. 속 좁고 어리고 세상 물정도 없으니 그저 까칠한 소장님이 무섭고 싫을 뿐이었다.
대학생 환영식에 참여했다. 무조건 신입생들은 다 참여해야 한다고 해서 수업이 그나마 일찍 끝나는 날 저녁 9시쯤 동기들과 함께 환영식 장소로 가게 되었다. 안양 1번가는 9시가 넘은 시간에 더 화려하고 반짝거렸다. 술은 20살이 되고 회사 회식에서 맥주 한두 잔을 마셔본 게 다였다. 주막집에 많은 학생들이 모였고 우리 테이블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처음 먹어보는 막걸리는 냄새는 별로지만 맛이 달달해서 잘 넘어갔다. 안주는 대학생들이 단체로 갈 만큼 싸고 맛있었다. 급하게 먹은 막걸리는 몸속에 들어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버렸다. 화장실에서 토하고 자리에 돌아오니 선배들과 동년배들이 막걸리는 토하면서 먹는 거라며 술잔에 다시 한가득 부어주었다.
술자리에서 여러 친구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 고충이 있고 멋이 있었다. 좀 더 친구들과 놀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먼 거리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막차시간을 미리 체크해 둔 상태였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자리를 떠나야 했다. 밤새워서 놀 친구들은 아직도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미리 전철을 타자고 약속했던 세 명이 급하게 안양역으로 뛰었다. 뛰다 보니 또 속이 안 좋았다. 안양역에 도착해서 또 토하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같이 토했다. 토사물을 처리할 시간도 없이 막차를 향해 다시 뛰었다. 다행히 골인. 머리는 빙빙 돌고 속은 여전히 매스꺼웠다. 막걸리의 무서움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 '살려줭~'
대학생이 되고 학교에 가는 게 서커스 곡예를 하는 것만큼 위태한 일상이었다. 매일 늦게 학교에 도착하니 사방팔방에 눈치가 보였다. 흥미가 없었던 영어영문과에 입학한 것도 난관이었다. 상고를 다니면서 기본적인 영어실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중간지식이 빈상태에서 대학영어로 몇 단계 고난도의 영어를 배우려니 힘에 벅차기도 했다. 주말에는 부족했던 일을 하려고 사무실에 나갔기 때문에 부족한 공부를 메울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을 좀 더 늘릴 수만 있다면 늘려 쓰고 싶었다. 꿈을 좇아 찾아간 대학교라는 동아줄에 맨손으로 매달려 손바닥이 다 헤지는 것도 모른 채 죽자고 버티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어떤 것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욕심을 낸 만큼 책임을 갖고 해내고 싶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춘향이 수절하듯 굳건했지만 지쳐가는 몸이 오뉴월 누렁이만큼 늘어지고 생기 없었다.
"제발요. 제발요. 저 잘하고 싶어요. 꿈도 이루고 싶어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하듯 뱉게 되는 말이었다. 평일은 평일대로 주말은 주말대로 집-회사-학교-집을 오가며 정신없이 지냈다. 최소한 기본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부족한 능력, 실력을 메우려면 성실한 시간과 노력이라도 따라줘야 했다. 그런데 걷지도 못하고 이제 기기 시작한 갓난쟁이 같았던 사회 초년생이 두 마리 토끼를 무리하게 잡으려고 발악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