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띠리링'~ 회사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가 전달됐다. 듣고 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신이 없었다. 중요한 몇 가지를 확인했다. "병원?" "그래서 치료는?" "나는 회사일은 끝내고 가야 해" "학교, 빠지고 회사 끝나는 대로 집으로 갈게" 집에서 큰일이 났다는 전화를 받고도 나는 일을 했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퇴근시간이 돼서 정신없이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병원에 계셨고 면회를 할 상태는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총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투병을 하기 전에는 가정 형편이 날이 갈수록 그럭저럭 좋아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극빈층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단칸방에 살다가 전세방으로 이사했었다. 아버지가 투병하기 전 빌라 집을 마련한 게 기억난다. 대출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수입으로 충당이 됐었다. 셋방살이와 전셋집에 살다가 아버지 명의로 처음 산 집이었다. 아버지가 태권도 학원을 보내주기도 했다. 엄마가 아프셔서 밥을 자식들에게 못 챙겨줬지만 형편이 안 좋아서 밥을 굶은 건 아니었다.
결국 우리 집이 급하게 기울어졌던 것은 아버지가 많이 편찮아지신 게 시초가 됐다. 아버지는 직장 내에서 인정받아 승진을 했었다. 조장에서 감독이 되었고 감독 생활을 오래 하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 생신 때는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았다. 단칸방에 살 때조차도 아빠의 생일날은 동네잔치를 벌일 정도였다. 어린 시절 잔칫날에는 늘 풍족하게 먹었다. 마당에 평상을 크게 놓았고 동네 아줌마들도 품앗이를 왔다. 엄마는 잔칫날 늘 많은 음식들을 내놓으며 음식 솜씨를 뽐냈다. 좁은 집이었지만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동안 찾아오는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버지 생신에 우리 집에 온 손님이 무려 300명이 넘었었다.
부천시를 총책임지는 유일한 청소 감독으로 명성이 대단했다. 아버지는 70년대 대통령 상을 받으셨고 승승장구했다. 집에 돈은 없었지만 나름 시에서 권세가 높으셨다. 당시 아버지는 권력자답게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를 만끽하셨다. 어린 시절 나의 기억으로 아버지는 강태공 저리 가라 싶게 낚시를 무척 좋아하셨다. 가정 형편이 풀린 건 아니었지만 집에 고가의 낚싯대들이 있었다. 에효, 지금 생각해 보면 철없는 아빠였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관념이 조금만 있으셨다면 그때 낚싯대를 살 것이 아니라 아파트나 주식을 샀었어야죠.'라고 혼잣말을 해본다. 그리고 그 시대에 세상에나~ 사냥도 하셨다. 집에 사냥 총도 한대 있었다. 겨울에는 꿩이나 토끼 등을 잡기도 하셨다. 아버지 스스로는 '생'에 동안 한량으로 사셨던 것 같다.
여하튼 아버지의 한량 다운 취미가 화를 불렀다.
사냥 총을 쏜 것이다. 빵~
나는 그 상황을 상상해 봤다. 문을 잠가놓고 총을 쏘셨다. 쏘기 간편한 권총이 아니었다. 기다란 사냥총을 자신을 향해 쐈다. 말이 쉽지 쏘는 것 자체가 아주아주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자세가 안 나오는 총을 억지로 쏘다 보니 미쓰가 생겼다. 당시 아버지는 폐 질환으로 폐가 녹아내려서 거의 없는 심각한 상태였다. 합병증으로 대상포진도 고질병이 되어 고통에 시달렸다. 당시에는 대상포진이 아주 어려운 질병이었다. 지금처럼 약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대상포진으로 극심한 통증을 약 없이 견뎌야 했다. 심각했던 폐쇄성 폐 질환과 심장판막 질병보다 더 아버지를 괴롭혔던 게 대상포진으로 인한 통증이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병증으로 고통이 심해서 자살할 생각으로 총을 쏘셨다고 했다. 그러나 자살시도는 미수가 되었다. 각도가 안 나온 총구에서 총알은 배를 관통하며 큰 상처를 내고 말았다. 아버지는 재빨리 병원으로 옮겨졌고 치료를 받으셨다. 그러나 이후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사냥용 총을 집에서 소지했으므로 형사적인 책임도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의료보험 혜택이 안 돼서 치료비가 크게 발생되었다. 혼동 속에서 내가 기억하는 건 단편적인 내용뿐이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장 돈이 필요하다.
엄마는 2천만 원이 넘게 필요하고 그만한 돈은 나밖에는 마련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1996년에 2천만 원은 상당히 큰돈이었다. 현재 압구정 현대아파트 30평대가 40억 가량 하는데 당시에 2억이 안 됐을 때다. IMF를 직전에 두고 있었던 1996년에는 이자도 상당히 높았다. 대기업을 다닌 덕분에 대출을 할 수 있었다. 회사에는 직원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놀랍게도 1%의 적은 이자로 대출이 가능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기혼자만 대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20살인 나에게 급하게 배우자를 찾을 능력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는지 백방으로 알아봤던 것 같다. 회사에서 일반 신용대출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2천만 원에 대한 이율은 연 14%였다.
총을 쏜 아버지는 치료를 받으셨고 20살이었던 나는 연 14%의 2천만 원이란 큰 빚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