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비교해도 우리 회사의 월급은 많은 편에 속했다. 거의 30년 전에는 타사에 비해 많은 편이었지만 절대적인 월급이 많지는 않았다. 당시 연봉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지만 상여금 없는 월급은 100만 원에 한참 못 미쳤다. 대학 등록금을 내기 위해 카드깡 한 원리금 30만 원은 작은언니에게 매달 주고 있었다. 그리고 2천만 원 대출금은 원금 없이 이자만 매달 30만 원가량 됐다. 월급을 받아도 30만 원도 안 되는 돈이 남았다. 그때부터 엄마에게 월급 탄 돈을 안 드렸던 것 같다. 남은 돈은 점심값, 대중교통비용, 핸드폰 요금 등을 납부하고 나머지는 학교생활에 사용하거나 용돈이 되었다.
매일 일상은 시계 톱니바퀴처럼 쉼 없이 움직였다. 지하철 1호선, 전쟁 같은 지옥철에서 출근길에 올랐다. 회사에 도착하면 아침부터 퇴근 전까지 1분도 쉴 수 없는 시간을 채웠다. 하루 일과에 빈틈은 없었다. 출근하면 사무실을 정리하고 간단한 청소를 했다. 매일 영업소에는 외야 사원을 상대로 한 회의 및 교육이 아침 9시 반, 오후 4시 반 두 차례 진행됐다. 오전 9시 반에 회사 방송을 틀고 매일 소장님의 교육이 시작됐다. 소장님이 외야사원에게 교육하는시간에 나는 출근 체크 입력 등 전산에 입력할 일들이 있었다. 교육이 끝나면 오전에 서류를 받고 입력하고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영수증 관리등 총무의 관리업무에 신경 써야 했다. 짬이 나면 고객만족 모니터링 전화를 했다. 석회 시간에도 귀는 열어놓고 손은 내내 움직이며 입력을 하고 전산 확인을 했다. 석회가 끝나면 오후 서류를 수납하고 정리했다. 퇴근 전에 영수증 정리를 하고 시제를 맞추고 매출 보고를 했다. 영업소장님의 운영비 등 중간에 챙겨야 하는 일로 은행 업무를 보기도 했다. 월중 교육일정을 체크하고 영업소에 매달 생기는 신입 외야 사원들 교육도 매주 챙겼다. 잠시라도 짬을 내서 중간중간 사무실 환경정리와 판촉물 정리를 하곤 했다.
퇴근길에 학교로 향하는 길은 늘 뜀박질을 해야 했다. 열심히 달리는 수고에 비웃기라도 하듯이 매일 첫 수업 시간은 무조건 지각이었다. 주말에는 밀린 회사 업무와 학교 과제를 하느라 항상 회사에 출근했다. 학교 공부는 나름 한다고 하는데 대학 영어라는 게 꽤 어려웠다. 영어실력이 부족했던 나에게 대학영어는 외계어처럼 느껴졌다. 학교 진도를 따라가는데 급급했다. 중간시험을 치르면서 성적이 잘 안 나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당연한 결과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너무 짧아서 속상했다. 시간이 좀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학교에는 꾸준하게 일일호프나 엠티 등 일정이 있었다. 그런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수업을 따라가고 과제를 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이미 높은 허들이라 그 허들과 씨름하기 바빴다.
생애 처음으로 사귀였던 남자친구는 독서실 총무로 일하며 여전히 공부하고 있었다. 대학교는 휴학을 하고 자격증 시험을 열심히 준비 중에 있었다. 남자 친구보다 바빠진 나의 일상으로 데이트하는 횟수가 점차 뜸 해졌다. 남자친구와 종종 통화는 했지만 자주 만날 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간을 내는 것도 힘이 들었다. 나는 집안 사정이나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남자친구에게 말하지 못했다. 어느 날 남자친구가 자주 못 만나는 게 속상하다는 표현을 했다. 어리고 바쁘고 현실이 힘에 겨운 20살의 나는 남자친구의 작은 불평 한마디 표현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돌아오며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을 혼자 마음속으로 먹었다. 그리고 다시 분주한 한 달여를 지나갔다.
혼자서 마음정리를 다 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하러 가는 날,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선물을 사서 예쁘게 포장하고 편지도 썼다. 맛있는 걸 먹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일, 공부, 학교생활, 회사 생활, 회사에서의 입지, 학교 성적, 감당하기 힘든 빚, 아버지의 사고, 집안 사정 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이야기 자체가 구차스럽게 느껴졌다. 밝고 좋은 모습만 기억하길 바랐다. 나를 불쌍하게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 생활도 학교생활도 나름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더 발전적인 사람이 되고 멋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와중에 아무렇지 않게 이별을 통보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 나는 회사 생활로 바쁘고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못되게도 스스로 정리한 말을 그를 향해 일방적으로 랩을 하듯 혼자 중얼거리며 내뱉었을 뿐이다. 당황하는 그가 말을 하려고 했다. 무슨 말은 했던 것 같다. 오디오가 고장 난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말하는데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 입장만 급하게 이야기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그를 떠났다. 이후 순식간의 일이 납득이 안 됐던 그가 연락을 해왔지만 받지 않았다.
나의 풋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기적이고 못됐던 20살의 나는 그가 나를 최대한 오래, 아프게 기억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남긴 쪽지에도 끝까지 착한 척을 하며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