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당시 안양지점의 지점장님은 유능한 분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보험회사의 중요한 성과 지표는 외야 사원, 즉 보험설계사 증원과 신계약 매출 두 가지다. 보험영업을 하는 설계사들이 많을수록 매출이 오르기 때문에 인원을 유치하는 건 아주 중요했다. 안양지점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2년 전 안양지점이 인원수도 대폭 늘고 규모가 커지면서 안산지점을 분할시키기도 했다. 영업소는 지점 산하에 포함된 하부조직이다. 당시 크게 성장한 안양지점은 두 개의 지점으로 분할했다. 기존엔 안양지점만 있었는데 안양지점, 안산지점으로 분할한 것이다. 지역적으로 안산에 소속되어 있던 영업소 8곳이 안산지점으로 배정되었다. 지점이 분할했다는 것은 지점장님이 대단한 성과를 낸 것임을 의미했다. 회사는 지점장의 실력을 인정했고 그는 탄탄대로 성공가도에 있었다.
내가 속해있던 안양 합동 대리점은 지점과 같은 건물인 회사 사옥에 있지 않고 안양 시내에 별도 건물에 임대한 사무실이었다. 아무래도 외곽지역에 퍼져 있는 영업소들은 사옥 내에 밀집해져 모여 있는 사람들보다 정보를 접하는 게 한발 늦었다. 어느 날 소장님이 급한 회의가 있다며 지점으로 들어가셨다. 회의를 다녀온 소장님은 지점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전해주셨다. 안양지점 소속의 한 영업소에서 금전사고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전설로만 내려오던 금전사고가 있었다는 말을 듣자 무서워졌다. 이후 총무들도 전체회의에 소집됐다. 사옥 내에 있는 직원들은 즉각 지점 회의장에 모여 이미 참석해 있었다. 몇 개 외곽 점포들에 있었던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총무는 다소 늦게 회의 장소에 도착했다.
지점 내에는 한 명의 지점장과 두 명의 과장이 있었다. 과장은 마케팅 과장과 인사과장으로 나눠 업무를 담당했다. 총무들은 마케팅 과장님만 자주 볼 수 있었다. 마케팅 과장님은 지점에 속해있는 각 영업소의 총무들과 유기적으로 연락했다. 총무들은 지점에 보고할 일의 대부분이 마케팅 과장님과 관련이 있었다. 반면 인사과장님은 외야 사원인 보험 설계사나 대리점 사장님들과 직접 접점이 있었다. 외야 사원들은 입사하려면 최종적으로 지점 내에 속해있는 인사과장과 면접을 봐야 했다. 보통 총무들은 인사과장님과 대면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총무들 앞에 인사과장님이 나서서 회의를 주도했다. 금전사고가 발생됐고 그 사고 유발자가 외야 사원인 설계사였기 때문이다.
지점에 모여있는 총무들은 모두 긴장했다. 최초 사고자는 누구이고 어느 영업소 소속인지가 발표됐다. 현시점 발견된 사고금액은 얼마인지, 앞으로 어떤 조치가 진행될지도 설명해 주셨다. 모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한 영업소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기도 했다. 안심도 잠깐일 뿐 전면적인 감사가 진행될 거라고 했다. 사고 자체를 알게 된 게 민원으로 알게 됐고 사고의 규모는 아직 미지수였다. 민원은 단 한 건이었지만 전수조사가 시급했다. 해당 점포뿐 아니라 전면적인 감사가 이루어지면 너도 나도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금전사고는 형사적인 책임과 민사적인 책임까지 감수할 수 있었다. 사안에 따라 자체 감사만 하는 게 아니라 경찰 조사까지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말을 전달받았다. 해당 영업소의 총무는 회의가 끝나고 끝내 눈물을 흘렸고 분위기는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상태였다.
금전사고 건은 일파만파 소문을 양산했다. 조용조용 넘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결국 금전사고를 낸 설계사의 신상이 전체적으로 공개됐다. 그에 대한 말들이 하나씩 퍼질 때마다 모두들 놀라게 되었다. 사고 낸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천여 명의 외야 사원이 모여있는 지점에서 아주 유능하고 보험왕 순위에 오르내리는 설계사였다. 어떻게 소득도 많은 대형 설계사가 돈사고를 낸 것인지 소문이 무성해졌다. 감사는 모든 지점 내에 영업소로 확장됐으며 우리 영업소도 한동안 감사가 이루어졌다. 사고 낸 사람의 금전사고 금액이 윤곽을 드러나면서 모두가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다. 무려 1억 원 정도의 초대형 사고가 난 것이다. 97년 당시 1억 원은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말도 안 되게 큰 금액에 모두가 경악했다. 사고금액으로 지점은 발칵 뒤집혔고 어떤 방법으로 수습이 되는 것인지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해당 영업소 총무는 며칠씩 감사를 받으며 힘든 날들을 겪고 있었다. 각 영업소 총무들도 초비상이 돼서 특별감사에 임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영수증 관리였다. 말 그대로 당시 영수증은 책권으로 발행해서 외야 사원들이 한 권씩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대형 사원일수록 한 권이 아니라 몇 권씩 도 가지고 다니던 게 문제가 된 것이다.
해당 영업소 총무는 일을 잘하는 대형 설계사가 영수증 책권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걸 순수하게 믿어 버렸다. 외야 사원의 말만 믿고 분실된 영수증에 대한 공증업무를 바로 처리하지 않았다. 체크하지 못한 작은 업무실수가 큰 문제가 되어 사고로 뻥~ 터져버렸다. 당시에는 보험료를 외야 사원들이 직접 고객들에게 현금으로 수금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사고는 어디에든 도사리고 있었다. 설계사는 고객에게 돈을 받고 영수증을 발행했다. 그리고 영업소에는 영수증을 잃어버렸다고 하고 새로운 영수증 책권을 발행받은 것이다. 교육으로만 들었던 사고가 현실로 닥쳤고 그제야 모두가 실감했다. 영수증은 말 그대로 정말 백지수표였던 것이다. 해당 총무는 영수증 관리를 소홀하게 한 것으로 처리돼서 같이 조사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몇 개월이 지났고 총무는 경위서를 쓰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금전사고를 일으킨 설계사는 강제 퇴직 처리되며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민사적인 조치를 회사 차원에서 하는 것으로 하고 고객들에게는 배상하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설계사나 다른 영업소에서는 사고 발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안타깝게도 최고 관리자인 지점장님은 무사할 수 없었다. 본 사항에 대한 책임자로서 유능하고 인자했던 지점장 장님이 책임을 통감하며 사직서를 내게 되었다. 자발적 사표라기보다는 결과적으로는 잘리게 된 것이라고 봐야 했다. 탄탄대로에 있었던 잘 나가던 최고 책임자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그 일은 우리 모든 지점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교훈을 남겼다.
금전사고로 큰 회오리바람이 불게 되면서 내가 욕을 먹었던 사건이 지점 내에서 뒤늦게 홍보로 사용되었다. 총무로서 원칙을 지키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며 우수사례로 칭찬을 받게 된 것이다. '왓??? 모라고요? 욕먹고 마음고생한 게 잘한 거라고요?' 한동안 그 일은 총무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자세라고 치켜세워졌다.